매일신문

人生에는 은퇴가 없다-(2)아버지의 추억

내가 태어나 자란 경북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그곳에서 또래의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는 철부지로 유년을 보냈다. 산판 트럭 꽁무니에 매달려 시커먼 연기를 마셨고, 소싸움을 구경하려고 읍내까지 뜀박질을 했으며, 겨울에는 인근 예배당에서 마을사람들 틈에 끼여 활동사진을 보기도 했다.

가장 또렷한 기억은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평양으로, 만주로 다니시다 해방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집과 마을을 떠나 있었던 미안함을 만회라도 하실 요량이셨던지 마을 일에 매우 열심이셨다.

그러나 1946년 10월 '대구 폭동'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뒷산에 빨치산이 나타나면서 아버지는 또다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빨치산이 마을 일에 앞장서는 아버지를 포섭하기 위해 유독 우리 집만 찾아온 것이다.

총과 죽창을 든 빨치산들이 한밤중에 "이만호 어딨어?" 하고 들이닥치면 온 식구는 간이 콩알만 해져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몸을 피하셨고 화가 난 빨치산들은 어머니의 가슴에 공포탄을 쏜 적도 있었다. 몇 번은 잡혀가시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매번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오셨다. 마을 어른들은 "근이 아버지는 워낙 입담이 좋아서 빨치산들이 포섭을 못하고 오히려 설득을 당한 게야"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유명한 입담, 그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초겨울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나무 하러 갔을 때였다. 아버지는 땔감을 가득히 올린 지게를 세워놓고 "근아, 이리 와서 내가 하는 거 봐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손을 툭툭 털더니 소나무와 떡갈나무 앞에서 큰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고, 이쪽 나무를 보다가 저쪽 나무로 눈길을 돌리며 호소하듯이 열변을 토하셨다. 그리고 나시더니 나에게도 한번 해 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나무 보고 무슨 말을 해요. 누가 보면 어찌 생각하겠어요?" "근아, 저 나무들은 앞으로 네가 만날 사람들이라고 상상해라. 그리고 그들이 감동할 수 있을 만큼 연설을 한번 해 보란 말이다."

한참을 망설이다 '여러분'하고 나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오기가 솟았고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꽤 오랫동안 떠들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도 적잖이 놀라신 듯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시더니 그만 내려가자고 하셨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내 나이 스물 아홉 살 때 세상을 뜨셨다. 나무를 군중으로 생각하고 연설하라던 아버지의 말씀이 예언이 되었는지 나는 거의 매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 가끔은 청중들 사이에 아버지께서 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면 의원에 출마하셨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채 민선 도지사 아들을 바라보는 모습을….

이의근 경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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