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1528년 9월. 텍사스 연안의 갤버스턴 섬에 표류한 에스파냐 원정대의 생존자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해변에서 야영했던 다섯 '문명인'들은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서로 잡아먹어야 했다. 거기서 한 사람이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그를 잡아먹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 원주민들은 이 사실에 너무나 분개했다. 그들이 얼마나 격노했던지 "만약에 그 현장을 직접 봤다면 대원들을 자기네 손으로 죽였을 것이며 우리도 무시무시한 위험에 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례 2…1519년 아즈테카의 수도 테노츠티틀란(현 멕시코시티)은 꿈의 도시였다. 정교하고 거대한 수로 망에는 수천 척의 개인용 카누로 가득했고 선착장에 고기잡이배들이 드나들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궁과 궁전, 대저택들, 아도비 벽돌로 지은 나지막한 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넓은 교회와 매일같이 수천 명이 찾는 시장, 흰색으로 칠해진 거대한 피라미드들은 도시의 거대한 규모를 상징했다.
수천 년 동안 번영해온 고대 문명과 식인까지 서슴지 않았던 백인 유럽 침략자. 문명과 야만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서로 존재조차 모르던 두 문명이 충돌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한 줌도 되지 않았을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고도의 문명 국가였던 아즈테카와 잉카를 무너뜨렸다. 열세에 놓인 아즈테카와 잉카의 무기 기술과 전술, 원주민 내부의 분열과 내분, 특히 천연두와 같은 면역력이 없는 질병의 습격은 승자와 패자를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태양의 제국, 잉카의 마지막 운명'은 에스파냐 정복자들에 의해 처참하게 몰락했던 남아메리카 대륙 아즈테카와 잉카 문명의 최후를 담아낸 책이다. BBC 고대문명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완결편으로 원제는 'Conquistadors', 즉 '16세기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한 에스파냐 정복자'를 뜻한다. 제목처럼 책은 멕시코 북부의 사막에서 눈 덮인 안데스 산맥까지 아마존 정글에서 고지대의 마추픽추까지 총과 십자가로 잉카와 아즈테카의 영혼을 정복한 에스파냐 정복자들의 궤적을 좇는다.
코르테스, 피가로 형제가 감행했던 고통스런 여행과 에스파냐의 아즈테카와 잉카 제국 정복을 둘러싼 온갖 거칠고 험난한 사건들, 아마존을 발견하는 오레야나의 특별한 항해와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 태평양에 이르는 카베사 데 바카의 여행이 속속들이 담겨있다. 저자 마이클 우드는 역사다큐멘터리 집필과 제작·진행 등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해 왔다. 지금까지 50여 편 이상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모두 책으로 출간됐다. 이 책은 역사 연구서는 아니다. 문헌 자료와 현지 답사에 바탕을 둔 한 편의 이야기에 가깝다. 생생한 현지 답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글의 박자가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다.
에스파냐인들의 정복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재앙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며 독립적으로 유지되던 마지막 문명을 불과 한두 세대 만에 무너뜨렸다. 에스파냐의 정복 사업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였던 동시에 가장 잔인하고 파괴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에스파냐 원정대는 극도의 고난을 견뎌내며 티에라 델 푸에고에서 카롤리나까지 광대한 땅을 점령해 갔다.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원주민 국가, 잉카 제국, 종교를 완전히 쓸어냈다.
신세계의 발견은 세계의 경제와 문화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정복자들은 유럽인들이 석기시대 이래로 지켜온 식습관을 바꾸어놓을 이방의 먹을거리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감자, 토마토, 후추, 옥수수, 고구마, 아보카도, 구아바, 파인애플, 담배, 초콜릿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은 신세계 동·식물의 표본도 가지고 왔다. 목련과 루핀, 다알리아와 앵무새, 왕부리새들은 부자들의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옥 조각상, 비취로 만든 작은 개구리, 흑요석 칼, 터키석 가면 등 화려하고 이국적인 공예품들이 수집가들을 매혹시켰다.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에 이뤄진 교환, 즉 '콜럼버스의 교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다. 정복자들은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한 대규모 폭력과 살상, 파괴를 자행했다. 천연두, 말라리아, 홍역 그리고 온갖 성병이 구세계에서 신세계로 건너갔다. 질병의 영향으로 16세기 동안 수천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즈테카와 잉카는 정복당했지만 기층 민중의 삶과 문화는 살아남았다. 많은 풍습과 신앙이 안데스의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지금까지 완고하게 지켜져 왔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유지해 온 전통문화와 정체성은 세계화의 거친 물결 속에서 불과 한두 세대 만에 급격히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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