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人生에는 은퇴가 없다-(3)팔조령의 선물

처음으로 청도를 벗어난 것은 대구상고에 진학하면서다. 나는 지금의 신천(新川) 상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내 방은 금세 아지트가 되었고 친구들이 찾아와 밤 늦게까지 토론을 벌이는 일이 잦았다. 동기생 중에는 제법 유명세를 탄 친구도 있다. 코믹한 연기를 잘 하는 오지명은 그때도 벨벳 바지를 빼 입고 머리를 싹싹 빗으며 폼을 잡고 다니는 걸로 유명했다.

자취하며 주말이면 고향집에 다녀 왔다. 요즘처럼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집에 가는 길은 언제나 고생길이었다. 가창 우록 삼거리에서 버스를 내려 여덟 구비나 된다는 팔조령(八助嶺)을 걸어서 넘어야 했다. 팔조령은 예로부터 동래에서 한양까지의 관로 중 문경새재 다음으로 높다고 할 정도로 험준하다. 그 험한 고개를 어깨에 반찬 그릇이나 빨랫감 등을 얹고 매주 넘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2학년 올라가던 어느 봄날이었던가. 그날 따라 겨울 옷가지와 솜이불 보따리가 몹시도 무거워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할 때는 이미 어둠이 짙었고, 바위 위에는 '납딱바리'(살쾡이인듯) 한 마리가 눈에 시퍼런 불을 켜고 나를 노려보아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힘겹게 고개 마루에 올랐을 때는 상현달이 서편 하늘에 떠 있는 걸로 보아 이미 자정에 가까운 듯했다. 나는 짐을 내려놓고 기대어 앉았다. 하늘에는 별들이 얼마나 많은지 흡사 자갈이 넓게 깔린 해변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장남이라는 부담감, 동생들 걱정, 학교생활, 그리고 장래 문제까지….

그러던 어느 순간 중학교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도덕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죽은 고기는 아무리 커도 물에 떠내려 가지만, 작은 피라미라도 살아있는 한 물을 차고 거슬러 오른다'며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삶을 살라 하셨다. '그래, 무슨 일을 하든 행동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자!' 나는 벌떡 일어나 고함을 한번 지르고 이불짐을 던지듯이 어깨에 올렸다. 아까와는 달리 전혀 무겁거나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생기가 가득 차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니 어느덧 새벽 세 시를 넘기고 있었다.

나는 그 후 오랫동안 팔조령에서의 그날 밤을 잊지 못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이겨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날 팔조령이 나에게 준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옛 내무부 국장으로 있을 때 아내와 함께 팔조령 그 자리를 찾아 감회에 젖기도 했다. 지금은 팔조령에 시원스레 터널이 뚫려 대구에서 청도까지 쉽게 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요즘도 가끔 옛날 그 고갯길을 걸으면서 지난날을 회상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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