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향촌동에서

문단일화 '향촌동시대'를 연재하면서 대구의 옛 번화가였던 향촌동을 여러번 찾았다. 한국전쟁으로 피란문단이 형성되면서 1950년대를 풍미했던 문인묵객들이 드나들던 술집과 다방 그리고 그들이 뿌려놓은 낭만과 일화, 그 편린이나마 더듬어 나선 향촌동은 무더위만 여전했다.

더러는 당시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문인 예술가들이 표류하던 좁은 골목길도 여전했으나, 퇴락한 거리에 옛 정취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화가 이중섭이 드나들던 백록다방 자리 앞에서 향촌동시대의 술집 여주인을 만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음악감상실 '녹향' 2층에 자리했던 곤도주점의 할머니였다. 곤도주점이란 권(權)씨의 창씨개명 곤도(近橙)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당시 숱한 취객들의 사랑방이었다. 팔십이 넘은 곤도주점의 할머니가 기자와 동행했던 원로 문인을 알아본 것이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할매집이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기자와 노작가는 할매집에서 막걸리잔을 들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멋쟁이들은 전부 외상 술꾼이었지. 이제는 모두 가고 없어. 그들이 그립구먼…."

곤도 할머니의 넋두리가 흑백영화의 낡은 필름처럼 공회전을 거듭했다. 초저녁부터 기울인 술잔에 주흥이 도도해진 노작가는 남인수의 '낙화유수'(落花流水)를 불렀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 꿈을 엮은 맹세야, 세월은 흘러가고 청춘도 가고…."

술집 할머니와 일흔 중반의 옛 단골 문인은 어느덧 향촌동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전후세대인 기자는 노작가의 체험적인 풍류에 그저 관념적인 낭만의 박수를 보낼 뿐이었다.

살아보지 않은 세월을 어찌 공감하랴만, 막걸리 몇되에 무르익은 낭만에 새삼 놀랐다. 향촌동시대를 되돌아보면서 작금의 문단에는 낭만이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요즘 시인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고은 시인의 은유적 일갈과도 상통하는 얘기가 아닐까.

문학과 예술이 가슴에서 우러나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져 나오는 세태를 질타한 고은 시인에게 자꾸만 공감이 가는 것은 향촌동에서 막걸리에 취해서일까. 향촌동시대로부터 반세기의 세월,

오늘 대구 문단에는 낭만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에토스만 있고 페이소스가 없는 문인과 문단이라면 왠지 정감이 가지 않을 것 같다.

향촌동에 그럴듯한 막걸리집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 낙화유수의 무상(無常)에 겨운 사람들이 그리운 노래 한가락쯤은 길어 올릴 수 있는, 단골들에게는 외상술도 주는, 풍류있는 막걸리집이 향촌동에 생기면 우리 삶과 문학에 낭만이 되살아날까.

시와 소설이 홍수를 이루고, 비싼 술집이 넘쳐나는데도, 세상은 어찌하여 냉기만 더해가는지. 삶은 어찌하여 늙은 유령처럼 떠돌기만 하는 것인지. 향촌동 골목에 서면 아폴론의 이성보다 디오니소스의 열정이 더 그립다.

조향래/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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