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의 한자-의천과 지눌

고려 초기 불교의 종파는 5교(五敎)와 9산(九山)이 양립, 존재하면서 대립해 침체된 상태에 있었다. 이때 불교 통합을 주장한 의천과 지눌은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의천의 천태종은 불교에서 교리 체계인 교(敎)와 실천 수행법인 지관(止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敎觀兼修(교관겸수)를 내세워 교종 위주의 통합을 주장하였으며, 지눌이 창시한 조계종은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며, 좌선(坐禪)을 주로 하여 마음에 경전을 깨닫도록 하는 *頓悟漸修(돈오점수)의 수도방법으로 수행을 강조하였다.

의천은 고려 제 11대 왕인 문종과 인예왕후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출가해 화엄종의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화엄종에 그치지 않고 여러 종파를 두루 연구하였으며 특히 천태종을 연구하기 위해 송으로 건너가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불법을 공부하고 불경을 수집하였다.

송에서 귀국한 의천은 흥왕사의 주지가 되어 그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송·요· 일본 등에서 수집해온 경서를 정리하여 《속장경》4천740여 권을 간행하였다. 그는 흥왕사 주지를 거쳐 선암사, 해인사 등에 있다가 숙종의 간청으로 다시 흥왕사에 들어왔으며 숙종 2년(1097) 2월에 국청사가 새로 세워지자 그곳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하였다.

그는 먼저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 각파를 통일한 후 교관겸수(敎觀兼修)의 교리 체계를 가진 천태종을 내세워 선종을 포섭하였다. 이렇듯 의천은 불교의 종파를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한국 불교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는 죽기 이틀 전에 국사에 책봉되었으며 선암사에 *진영(眞影·보물 제 1044호)이 보존되어 있다.

지눌은 1158년(의종12)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8세 때인 1165년에 출가하여 승려가 돼 1182년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출세를 단념하고 평양 보제사에서 열린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여 그곳에 모인 승려들과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고 오직 불법만 닦기로 약속했다. 1185년 경북 예천에 있는 보문사에서 을 읽고 선·교 통합의 필요성을 깨우치고 참선과 부처님 말씀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함을 주장했다.

그는 1190년 팔공산의 거조사에 머물면서 '권수정혜결사문'이라는 결사문에서 마음을 바로 닦으면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어 지리산 상주무암에서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백성들과 함께 그들의 어려움을 나누는 것이 진정 부처가 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은둔 생활을 탈피, 속세로 내려왔다.

1200년 길상사로 옮긴 지눌은 참선으로 마음을 수양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몸소 실천할 것을 주장하며 그때까지 선종과 교종으로 나뉘어 있던 고려 불교를 하나로 통합하는 조계종을 창시하여 의천의 천태종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 산맥으로 우리나라 불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자료제공 : 장원교육 한자연구팀

◇ 한자풀이

1. 敎(교) : 가르치다 觀(관) : 보다 兼(겸) : 겸하다 修(수) : 닦다

2. 頓(돈) : 조아리다, 넘어지다 悟(오) : 깨닫다 漸(점) : 점점, 차차 修(수) : 닦다

3. 眞影(참 진, 그림자 영) : 얼굴을 주로 나타낸 그림, 또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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