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을 뒤흔드는 국가안전기획부의 불법 도'감청 파문이 어떻게 튈지 종잡을 수가 없다. X파일. 그 속에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내용이 담긴 것으로 다들 짐작하고 있다. 일부가 드러나긴 했어도 그러나 아직은 짐작에 불과하다. 모두가 공개여부에 목을 매다니 내용 여부는 안중에도 없다. 만에 하나 빈 파일이라도 그 X파일은 어쩌면 행복한 파일이 될 성싶다.
정치권은 이 파일이 그들과 재벌, 언론의 불법 커넥션이라는 항간의 지적에도 자성의 기미는커녕 "너를 두고 하는 말"이라며 서로 윽박지른다. 여야가 따로 없다. 파장에 엿장수처럼 청와대도 질세라 전면에 나섰고 뜬금없이 무슨 기자회견은 또 그리 잦은가. 더 가관인 것은 이를 둘러싸고 서로 음모라며 내치는 솜씨들. 미리 꽁무니를 빼려는 건지, 무슨 훈수를 두려는 건지, 아니면 불난 집에 부채질하려는 건지.
이런 내막도 알 리 없는 시중의 돌쇠는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이해할 리 없다. 그저 재벌총수의 축 처진 어깨 너머로 불쾌해 하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상상해야 하고 모르쇠나 변명으로 일관되는 관련자들의 의뭉스런 표정을 매스껍지만 쳐다봐야 한다. 내일은 또 무슨 뉴스가 이것과 관련해 저자의 장삼이사들을 꼬드길까.
오죽하면 도청만큼은 절대 안심하라는 팻말 붙은 음식점이 등장했겠는가. 그 음식점이야 이 판에 좋은 아이디어 하나 건졌지만 그 밖의 파리 날리는 음식점들은 여전히 죽을 맛이다. 파리 날리는 곳이 비단 음식점뿐이랴. 꼭 소용 있을 때 제자리에 있어 주었던 이웃 가게며 친근했던 세탁소며 이발소며 미장원들. 모두가 울상이다. 정치 멱살에 이런 서민들의 참상이 눈에 들 리가 있겠나. 없다. 너희들이야 살든지 말든지, 너희들이야 지갑이 텅 비든지 말든지, 너희들이야 직장에서 쫓겨 나든지 말든지. 그건 정말 '너희들' 사정일까. 개인 파산 신청 건수가 지난해의 두 배에 달하고 빈곤층이 700만 명을 넘어섰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 밑그림은 잘들 그린다. 권력을 나누겠다며 연정이니 대연정이니 가당찮은 그림들만 죽기로 작정하고 그리고 있다. 파장의 낌새가 진하게 느껴지는 그림인데도 계속 그런 그림밖에 그리지 못하는 솜씨.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녔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 금욕'자족'무치(無恥)를 생활신조로 삼았음인지 그가 가진 것은 옷 한 벌, 지팡이 하나에다 봇짐 하나. 나무 술통은 바로 그의 집. 이 집에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왔다. 소원을 물었다. 대답은 "햇볕을 가리지 말아 달라"는 요구였다. 그렇다고 쉽게 물러설 대왕인가. "당신은 철학자로서 남긴 작품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힐난조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당신은 진짜 무화과보다 그림 속의 무화과가 더 좋으냐?"고 반문한다.
이 시대에 더 슬픈 것은 이런 그림들을 너나없이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감만 흔들면 그림이 되고 무화과가 되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 무화과나무를 길러 무화과를 얻기보다는 단박에 무화과 그림을 그리려는 사람들. 옛말에 "이익을 한꺼번에 많이 얻으려 하면 화근이 깊어지고, 결과를 빨리 보려 하면 도리어 실패가 빠르다"고 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이런 현실에 강개(慷慨)하지 않고 있다. 부글부글 끓는 속만 태우며 눈치만 늘고 있다. 고려 말. 왕의 신임을 기회로 방탕과 음란을 일삼았던 요승 신돈(辛旽). 그를 속 빼닮은 치들만 득세다. 그 당시 정언 벼슬을 지냈던 석탄(石灘) 이존오(李存五) 선생. 신돈을 탄핵하다 울분으로 병이 나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남긴 시조 한 수.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망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오늘의 우리들 가슴을 적실 만하지 않은가.
햇볕을 좇아다니며 덮어 버리는 구름은 신돈. 신돈의 행패를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란 말구로 신랄하게 꾸짖는 선비의 강직한 성품. 민생은 버림받고 쫓겨나도 그 강개를 볼 수 없는 현실. 마치 X파일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양 그래도 거기에 목을 매달 텐가.
金埰漢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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