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새벽 1시 '인디라 간디' 공항.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해 9시간여를 날아가 도착한 그곳에서 33명의 청소년 적십자(RCY) 단원들을 먼저 맞은 것은 인도 특유의 습한 열기였다. 두 달 전만 해도 45℃를 웃도는 살인더위에 '거리의 아이들'이 열사병으로 숱하게 죽어갔다는 안내인의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거리는 역하고 지저분했으며 거지가 넘쳐났다.
대한적십자사 창립 100주년을 맞아 도착한 중·고생 RCY 해외봉사체험단원들의 인도 첫 인상은 적어도 그랬다. 그러나 버림받은 인도 아이들이 묵는 쉼터에서 3일간의 짧은 봉사를 하는 동안 단원들은 긴 여운 하나씩을 가슴에 묻고 돌아왔다.
◇'산스크리티' 아이들과의 첫 만남
지난 2일 인도의 수도 델리(Delhi) 외곽지역. 봉사단원들이 찾아간 곳은 가정집을 개조한 작은 쉼터였다. 종교적·경제적인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받았거나 부모를 잃은 4~21세 여자 아이들 25명이 모여 사는 작은 공간 산스크리티(Sanskriti)'. 천장에 달린 큰 선풍기가 한 줌 바람을 날리고 형광등 불빛이 겨우 내부를 밝히는 누추하고 어두컴컴한 이 둥지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정전으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땀방울은 옷을 적셔 그 옷을 쥐어짜면 바닥에 물이 흥건히 고였다.
"나마스떼!", "남남사!" 쭈뼛거리며 서있는 쉼터 아이들 속으로 RCY 단원들이 인도 인사말을 건넸다. 자신들과 다른 하얀 피부에 무릎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반바지(인도에서는 무릎을 보이는 것은 실례다)를 입은 낯선 이방인을 주시하는 그 큰 눈에는 왠지 모를 슬픔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어색함도 잠시, 아이들은 곧 RCY 단원들의 품안을 비집고 들었다.
"배가 허기진 만큼 정에도 굶주린 아이같아요. 한번 잡은 손은 절대 놓치 않고 너도 나도 제 손을 잡으려고 달려들어요. 빨리 쉼터 꾸미기에 들어가야 하는데…."(김혜림·여·포항 오천고2)
RCY 대원들이 모자나 강아지 모양의 풍선인형을 만들어주자 아이들은 자기만의 작은 보물창고에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물감으로 얼굴에 그림을 그려주는 '페이스페인팅'으로 자연스런 스킨십을 유도했고 디지털 카메라에 찍힌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아이들은 연방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카메라에 담긴 자신들의 모습을 꼭 확인했다. 또 찍어달라고 자꾸만 보채는 아이들은 누군가의 기억에 자신을 담아두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마음의 벽을 허물자'는 1단계 작전 완료. 내일은 변변한 책상도 없이 차가운 바닥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방 꾸미기에 나서야한다.
◇해맑은 영혼들과의 3일
3일 오전 산스크리티 생활공동체 아루나 쉐르마(Aruna Shorma·여·43) 원장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언니, 오빠들이 곧 올거라며 오늘 하루만 학교에 빠지겠다고 하더군요. 그 간절한 눈망울을 외면할 수 없어서…"
RCY와 쉼터아이들이 빙 둘러앉아 벽에 붙일 게시판을 만들기 시작했다. 골판지, 물감, 풀, 색종이 등 갖가지 준비물을 예쁘게 자르고 붙이고 그리고 지우며 웃고 떠드는 산스크리티는 그야말로 난리법석이다. '꺄르륵' 자지러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디카로 찍은 아이들의 사진을 인화해 오려붙이자 한참을 주시한다. "me?(나예요?)", "yes." 짧은 영어로 자신을 확인한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본 자신의 사진이 신기한 듯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 공부한대요. 인도의 여자아이들은 주로 집안에서만 생활한다죠? 벽, 화장실, 계단이 '휑'한게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아요."(김세진·16·영주 영광중3)
점심은 산스크리티 아이들이 인도 전통음식을 직접 준비했다. 말린 콩, 완두콩, 렌틸콩으로 만든 걸죽한 '달'에 '로티(roti:효모를 넣지 않은 빵)', 망고, 오렌지, 구아바 등 과일이 둥근 쟁반에 가득 담겨 나왔다. 향신료를 이용한 소스도 빠지지 않았다. RCY 대원 한명씩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밥을 먹이는 시간이 끝나자 쉼터아이들의 장기자랑이 시작됐다.
닐루(5·여), 리시마(8·여), 소남(6·여), 루띠(5·여), 네이스마(9·여)가 학교에서 배운 인도전통춤을 선보인 것. 역동적인 춤사위를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데 신이 난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우리를 잊지 마세요' 아쉬운 작별
마지막날인 4일은 RCY대원들과 아이들이 첫 나들이를 했다. 목적지는 센트럴 델리의 라즈퍼트 동쪽 끝에 있는 인디아게이트(india gate).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한 인도병사 8만5천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는 42m 높이의 석조기념물이다. 갑갑해 보였던 쉼터를 벗어난 아이들은 거리에서 파는 비누풍선을 불며 즐거워했고 RCY대원들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 오후 2시쯤 맥도날드에서 사온 햄버거, 콜라로 점심을 떼운 아이들이 찾아간 곳은 델리의 한 놀이동산. 입장하자마자 세찬 비가 내려 2시간 동안 단 하나의 놀이기구도 타보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전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놀이동산에서 나와 헤어질 시간. 끝내 손을 놓지 않겠다던 아이들의 인상이 어두워졌다. RCY 대원들이 자신의 손수건, 볼펜 등 소지품을 꺼내 아이들에게 선물하자 아이들은 팔찌, 목걸이, 반지 등 자기만의 보물을 선뜻 건네며 RCY 친구들의 손바닥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한국에서 오신 학생들이 민폐를 끼쳐 죄송하다고 했지만 아니에요. 우리는 정말 행복했어요. 사람들의 발길이 한번도 찾아들지 않은 어두운 곳이었거든요. 우릴 잊지 마시고 언제든 다시 한번 찾아주세요." 산스크리티 아루나 쉐르마(Aruna Shorma·여·43) 원장의 마지막 말이었다.
인도 델리에서 서상현기자 ssa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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