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곳곳이 움푹 파헤쳐져 있고 비좁은 오르막 급경사 커브이니 운전 조심하소."
성주군 용암면 계상리 안조실마을에서 만난 이희갑(78)씨는 길안내 대신 신신당부부터 했다. 노파심이겠거니 하는 생각은 얼마 못가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갈명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폭 2m의 급경사 도로 중 절반 가량이 무성한 나무와 잡풀로 뒤덮여 있었다. 때마침 내린 굵은 빗줄기로 시야마저 가려져 길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웠다.
"이렇게 위험한 오솔길을 어떻게 차량으로 다닙니까?" "예전에는 길 주변의 나무 전지(剪枝)작업을 돌아가며 했는데 이젠 못해. 모두들 연로해 오토바이나 자전거도 타지못해 필요할 땐 택시를 불러 바깥나들이 가지."
20여분간에 걸친 아찔한 곡예 운전 끝에 도착한 갈명마을은 병풍처럼 산에 둘러싸여 수려한 산새와 풍광을 자랑했다. 300~500평 규모의 비탈진 밭에는 고구마, 감자, 고추, 깨 농사가 한창이었고 언덕배기 낡고 허름한 집 곳곳에는 농막(農幕), 여물통 등 옛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45년째 반장을 맡아 '종신반장'으로 불리는 김진언(73)씨 집에서는 70대 노인 10여명이 얘기꽃을 피우다가 기자를 반갑게 맞는다. 도무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들 화색과 기력이 정정하다. "비결이 뭡니까?"라고 질문을 던지자 김씨는 "공기와 물은 자연 그대로이고 무공해 음식에다 서로 의지하고 욕심없이 살기때문"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김녕 김씨 집성촌이어서 자세한 인적사항을 묻자 김씨는 "뭐 할라꼬 그리 꼬치꼬치 캐묻노?"라며 면박을 줬다. 다른 어르신들은 먼 길을 찾아 온 이방인이 불쌍하다는 듯 되레 김씨에게 눈을 흘겼다.
준비해 간 맥주 1박스를 내놓자 김씨의 부인 배계월(69)씨는 "정말 우리 얘기와 사진이 신문에 나오느냐. 얘들에게 자랑해야 된다"며 참외, 수박, 산나물 등으로 안주상을 차렸다.
툇마루에서 점점 굵어지는 비를 마주하며 서너순배 술이 돌아가자 어르신들의 살아온 애환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연신 맥주잔을 들이킨 김씨가 "건강하게 오래 살자"는 건배사를 외칠 때마다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이 마을 주민들의 제일 큰 걱정은 멧돼지 피해다. 대부분 고구마, 감자 등 밭농사로 소일하지만 시도 때도 없는 멧돼지의 습격에 이젠 체념한 눈치다. 이틀전 고구마밭 400여 평이 멧돼지때문에 쑥대밭이 된 김씨는 "우짜노. 평생을 당하는 일인데... 이젠 멧돼지랑 함께 사는 심정"이라고 말한다.
김씨의 형 진희(77)씨는 "3년전 밭에서 멧돼지떼를 쫒다가 다리를 크게 다쳤지만 행여 야생동물을 잡다가 다친 것으로 처벌을 받을까봐 걱정이 돼 병원에도 가지 못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혼자 사는 이분세(79·여)씨는 "수확도 제대로 되지않는 밭농사를 왜 짓느냐"는 질문에 "집에 그냥 있으면 뭐하노. 밭에서 움직여 나가 사는 6남매에게 무공해 농산물을 주는 기쁨을 모르제?"라고 반문한다.
마을에서 연세가 제일 많은 의성 김씨인 김창열(86)씨는 5년전 세상을 떠난 고(故) 박성출씨를 잊지 못했다. 박씨는 지난 1993년부터 7년간 자비를 들여 이 마을에서 시외버스 통행이 다니는 마월리 진건마을까지 마을버스를 운행했다. 버스를 타러 6km씩 걸어다니던 주민들은 버스가 집 앞마당까지 다니게 해 준 박씨가 너무 고마워 버스 기사와 안내양 숙식을 서로 제공하려고 인심을 베풀었다고 했다.
'성주의 달동네'로 불리는 갈명(葛明)마을은 사방이 깊은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600여m 고지대. 칡덩굴이 많이 우거져 있는데다 동향(東向)이어서 일찍 해가 뜨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밝다고 '갈명'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울창한 숲이 많다보니 10km나 떨어진 성주읍내 시장까지 한나절을 걸어 나뭇짐을 해다 팔았던 추억들도 많다. 당시 성주에서는 '갈명 나무'가 질이 좋기로 소문나 곳곳에서 나무꾼들이 몰려 '지게 행렬'을 이루기도 했다고 한다.
"나무 한 짐을 지게에 지고 3시간을 걸어가 나무를 팔면 막걸리 한 잔 걸치는 거고, 못 팔면 끼니도 굶고 되돌아오는 게지. 나무 팔아 산 꽁치를 술에 취해 잃어버려 혼난 적도 많았어." 이희갑씨가 젊은날의 음주경험담을 늘어놓자 폭소가 터졌다.
김진희씨가 "남보다 많이 팔려는 욕심에 지게를 두 개씩이나 낑낑거리며 옮긴 날도 많았고 나무를 산 사람이 집까지 배달해달라고 해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다"고 털어놓자 모두들 "젊어서 정말 고생했다"며 맞장구를 쳤다.
'고생 끝에 낙(樂)'이 온다 했던가. 김진희씨의 아들 경연(47)씨는 미국 유학을 다녀와 제주대 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6촌인 김진환(82)씨의 아들 원연(53)씨도 기계제작업체인 (주)대화삼기 대표로 대구에서 사업에 성공, 부러움을 사고 있다.
다른 주민들도 모두 자식을 잘 키워 대부분 아들, 딸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살고 있다. 마을의 '막내'로 궂은 일을 마다않는 김용출(67)씨는 "주민들끼리 '고향계'를 조직해 길흉사를 함께 치르고 자녀들 역시 상포계로 부모님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다"며 "김녕 김씨 일족만이 아닌 열 두 가구 모두가 한 집안인 셈"이라며 자랑했다.
동네를 둘러보다 중풍으로 4년째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강순금(72)씨 집 방문이 열려있어 무심코 들어갔다. 정작 강씨는 자신의 건강에 대해선 손사래를 치며 "주위 분들의 정성과 도움 덕택으로 중풍과 고혈압 증세를 보이던 남편(김진흥·78)이 최근 기력을 회복해 다행"이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연신 고마움을 전했다.
'종신반장' 김씨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할아버지.할머니! 정말 대접 잘받고 갑니다. 건강하시고 두 분 오래오래 사세요"라고 작별 인사를 건네자 "나는 색시라고 하는데 왜 할머니라 카노?"라는 면박이 또 돌아왔다. 하지만 왠지 정답게만 들렸다. 성주·강병서기자 kbs@imaeil.com
사진 : '종신반장'인 김씨 부부가 다정스럽게 두 손을 맞잡고 안개 자욱한 아름다운 산을 거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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