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향토 출신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

"나는 그대들의 심문에 응할 수 없다. 일본인의 재판에 응할 수 없다…. 내 이미 죽음은 각오한 바 있으니 너희 마음대로 하라."

구한말 항일 의병 연합부대인 13도 연합창의군 군사장으로 서울 진공작전을 펼치던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은 왜적의 재판을 끝내 거부한채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908년 9월 27일 정오의 일이다.

그로부터 97년, 왕산의 유족이 일제의 등살을 견디다 못해 만주로 망명한지 90년. 광복 60주년을 맞은 오늘 왕산 허위 선생을 재조명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사업이 본격화됐다.

구미시와 구미문화원을 비롯한 지역 기관단체와 학계 관계자들은 왕산 허위선생 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구미시 임은동 선생의 생가 터 600평에 조경을 해 공원을 조성, 생가 표석을 세울 계획이다. 또 생가 맞은편 야산 3천평을 사들여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을 건립하고, 기념관 내에 100석 규모의 '왕산 어린이도서관'도 만들기로 했다.

이와함께 임은동과 구미국가공단 2단지를 연결하는 도로 명칭을 '왕산로'로 정하는 한편 구미시교육청과 협의해 2007년 임은동에 문을 여는 초등학교 이름을 '왕산초등학교'로 짓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또 왕산의 전기와 전집 발간 등 관련 문화사업을 왕산 순국 100주년이 되는 2008년까지 연차적으로 펼쳐나갈 예정이다.

왕산 허위 선생 기념사업회는 지난달 8일 구미시청 대강당에서 창립총회를 가진데 이어 노진환 21세기경북발전위원회 위원장(아진·경북고속 회장)을 회장으로, 김관용 구미시장을 사업추진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왕산의 생가 터(시가 6억원 상당)를 기념사업회에 기증한 왕산의 장손 허경성씨(79·대구시 북구 산격동)는 "항일 의병 전쟁사와 항일 독립운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생을 다시 조명하고 업적을 기리는 일은 만시지탄이 있지만 반가운 일"이라며 "조상의 항일 애국정신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왕산은 1855년 경북 선산군 임은동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수학한 유학자로 충효사상과 위정척사사상에 입각한 애국애족의 민족정신을 지녔던 그는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이듬해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왕산의 의병은 충북 진천까지 진격하며 항일 무장투쟁의 깃발을 높였으나, "의진(義陣)을 해산하라"는 고종 황제의 칙서에 따라 군사를 물리고 청송군 진보 지방으로 물러나 후일을 기약했다.

왕산은 곧이어 조정 대신들의 천거로 원구단 참봉을 시작으로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평리원 수반판사 등을 역임하며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쓰러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왕산은 또 항일 언론가이자 개혁적 유학자인 장지연과 교류하면서 신학문을 수용하고 근대적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그 토대 위에서 의정부 참찬으로 근대적 개혁조치를 추진하던 왕산은 러·일전쟁 도발과 함께 일제가 한국침략을 노골화하자 이에 결연히 맞서다 옥고를 치른후 1905년 벼슬을 내던지고 향리로 돌아왔다.

이어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1907년 경기 북부지역을 근거지로 두 번째 의병의 깃발을 들었다. 여기서 선생은 인근의 의병부대와 연합 진용을 결성해 일경을 격파하고 친일 매국분자를 소탕하는 활동을 벌였다.

특히 선생은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의 편성을 주도하고 군사장이 되어 왜적의 통감부가 있던 서울 탈환작전을 펴 동대문 밖 20리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의병진이 약속한 기일에 닿지 못하자 300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고군분투하다가 패퇴하고 말았다.

서울 진공작전 뒤 왕산은 임진강과 한탄강을 무대로 일본군 진지 공격, 관공서 습격, 전신선 절단, 부일배 처단 등 강력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으나 1908년 5월 일본 헌병에 체포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54세를 일기로 서대문감옥에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왕산은 "아버님의 상사를 옳게 못했고 국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불충불효(不忠不孝)라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랴"란 유서를 남겼다.

1962년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고, 1969년 서울시는 왕산의 서울 진공작전을 기념해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의 거리 명칭을 '왕산로'라 부르기로 했다.

왕산은 혁신유림이었다. 왕산의 행적은 의병을 일으켰던 다른 유림들과는 또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1904년 '십조소'(十條疏)란 상소문에서 노비의 해방과 적서의 차별을 철폐할 것을 주장했으며, 후일 자녀의 혼사에 가문이나 신분에 구애받지 말라는 유서를 남긴 것은 당시 유림으로서는 실로 혁명적인 일이었다.

왕산은 러·일전쟁을 예견하면서 제국주의 속성을 간파했으며, 덴마크와 포르투갈의 예를 들며 작은 나라도 주체적인 개혁에 따라 자주적인 발전을 이루어나갈 수 있다고 설파했다.

왕산의 반봉건적 근대성과 자주적 민족주의의 발현은 기존의 성리학적 민족의식 일변도의 척사유림과 달랐다. 사회진화론이나 동양평화론에 도취해 일제 침략 앞에서 무력하게 자멸해간 인사들과는 판이한 차별성을 지닌다. 그 증거가 바로 1907년 재의병이다. 당시 일부 계몽주의자들이 의병을 외면했거나 해외로 도피했던 사실과는 실로 대조적인 것이다. 그래서 왕산은 혁신유림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될 것은 왕산의 의병조직이 당초부터 실전 능력을 구비하기 위해 해산 군인을 아우른 것과 13도 연합의진을 조직해 국권회복의 전투태세를 갖춘 것이다. 13도 연합의군의 활동은 또한 의병을 교전단체와 독립군으로 이념화, 이론화한 최초의 무장단체라는 관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의병이 독립군으로 발전한 주체적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노진환 왕산기념사업회장은 "한 가문에서 당대에 여덟 사람의 항일 독립운동 유공자가 배출된 것은 청사에 길이 빛날 일"이라며 "왕산의 순국 후 온 가문과 문인들이 국내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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