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문학 수업 시간이었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을 가르치면서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로 시작되는 시인의 아름다운 내면을 표현한 구절에서 학생들 자신을 시적 화자로 대치시켜 자신에게 떠오르는 말이나 생각을 자유롭게 적어보라고 하였다. 학생들이 적은 내용은 숲, 바다, 모짜르트 등 스케일이 크고 비일상적인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게임, 컴퓨터, 학교, 학원 등 주변적이고 일상적인 것이거나 '우리에게 두발 자유를 달라'는 등의 불만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소위 모범생일수록 그들에게 떠오른 생각은 폭이 좁고 단순한 일상사였다. 나는 학생들의 또 다른 내면을 기대하고 의도적으로, 말이 적고 생각이 깊은 아이라고 평소 생각했던 한 모범생에게 자신이 쓴 글을 발표해보라고 했다. 그런데 그 학생은 자신이 쓴 내용을 발표하기를 꺼려했다. 발표를 꺼리는 것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자신의 내면을 표현해볼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여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 이 학생에게 말 못할 무슨 큰 고민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도 되어 며칠 후 혼자 있을 때 물어보았다. 그는 수업 시간에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가 어려워 먼저 노트 한 편에 그림을 그렸다면서 칠판에 커다란 눈과 그 아래 흐르는 눈물을 강줄기처럼 길게 그렸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자신이 그때 적었던 글귀를 말했다. 먼저 '위험한 짐승'을 반복하여 썼고 다시 '불쌍한 인간'을 반복해 썼다는 것이다.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대화에서 그 눈물과 자조적인 표현 이면에 자신의 정체성 상실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릴 때는 무언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더욱 잘 할 수 있는 그 분야의 영재가 되기를 꿈꾸었는데 언젠가부터 깊게 알지 못해도 이것저것 다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모범적이고 누구에게나 인기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어느 정도 그렇게 바꾸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한편 더 깊은 자신의 내면에선 현재의 자신이 계속 불안하고 위험하게 느껴지며 불쌍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참담한 표정의 학생에게 현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적절히 잘하는 모범 형이 아니라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일을 즐기면서 창조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니 그 길을 모색해보자고 애써 위로하면서 난 다시금 이 시대 교사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흔히들 현대 사회를 탈산업사회라 하고 이 사회가 지향해야 할 교육적 패러다임의 키워드로 '다양화, 특성화, 자율화'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의 이러한 내면의식은 실제로는 우리 교육자들이 학생들을 여전히 산업사회 인간형으로 만들고 있다는 반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상품을 빨리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이고 이상이었던 산업시대에 요구되었던 획일적이고 표준화된 기계적이며 체제 순응적 인간형을 학생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은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머리모양에 그것도 조금만 더 길어도 불량아가 되며, 방학도 없이 내몰린 수업 시간 어쩌다 흥미 있는 만화에라도 한눈팔다 들키면 매 맞고 꾸중 듣는 것은 물론 부모까지 수모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7차 교육과정의 기본 방향이 '21세기 세계화 정보화 시대를 주도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한국인 육성'인 만큼 우리 교육자들은 수없이 이 말을 듣고 외치지만 사실 스스로 이 교육적 목표와 방향을 뚜렷이 인식하고, 자신의 교육관과 방법을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적다.
물론 우리나라 교육이 안고 있는 누적된 문제를 일시에 개혁할 수도 또한 완전히 외면하거나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나마 열린 마음으로 학생들의 다양한 재능과 개성 그리고 개인적 인지 능력과 학습 선호도를 고려하여 개별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하는 우리 교사들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1세기 세계화 정보화 시대를 주도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한국인의 육성은 바로 21세기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미래에 대한 교육적 비전을 가진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교사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순희 동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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