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외상을 주고 싶어도 술꾼이 없어." 대구 향촌동에서 50년 넘게 술집을 해 온 이월분(77) 할머니. 할머니는 요즘처럼 손님이 드물 때는 옛 단골들이 더욱 그립다고 한다.
향촌동과 함께 늙어온 할머니가 이곳에서 술집을 처음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50년대 초. 음악감상실 녹향 2층에 곤도주점을 열면서다. 왜정 때 무라카미초(村上町)라 불린 향촌동은 당시만 해도 대구의 최고 번화가였다.
할머니도 '월분'이란 이름처럼 소담스런 20대 때였다. 곤도주점은 남편 권(權)씨의 창씨개명인 곤도(近橙)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음식점에서 도제로 일식 요리를 배우면서 불린 이름이 곤도이다.
곤도주점은 방 1칸에 탁자 3~4개를 놓은 막걸리집이었지만 숱한 문인 예술가들이 단골로 드나들며 낭만과 일화를 뿌렸다. 소설가 최태응과 화가 이중섭, 음악가 권태호를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과 김윤환, 허만하, 김경환, 윤장근, 권기호 등 향토의 문인과 문학청년들이 사랑방처럼 출입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할머니는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별난 단골들의 행적이 눈에 선하다. 문우들의 술값을 우려내기 위해 빙글빙글 발레춤을 추어대던 노재붕, 취하기만 하면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를 애잔하게 부르던 한필우….
이름만 대면 알만한 향토의 명사들이 갚지 못한 외상값도 두루 헤아리고 있다. 그러나 받을 생각은 없다. 이제는 거의가 유명을 달리했지만, 지금이라도 그들이 술집 문을 열고 들어선다면 외상술을 또 주고 싶다고 한다.
곤도주점 이래 이씨가 운영한 술집의 명물 안주는 일본말로 스모노(醋物)라 부르는 초무침. 썬 오이, 양파에 닭고기나 해물 또는 쇠고기 수육을 넣고 식초와 겨자를 곁들여 버무린 독특한 맛의 요리이다.
할머니는 해방전 남편을 따라 일본 홋카이도까지 가서 배운 솜씨라고 자랑한다. "'곤도상'하면 초밥 잘하기로 유명했지". 할머니는 30여년전 타계한 남편 자랑도 잊지 않는다. "그때는 대구의 막걸리 맛도 일품이었고, 술꾼들도 모두 진국이었어…".
그러던 향촌동에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사양의 빛이 깃들었다. 문인들이 활보하던 거리에 재건복 차림들이 출현하면서 풍속도가 달라진 것이다. 50년대의 잔영마저 퇴색해 갈 무렵 할머니는 현재의 대보백화점 자리에서 송림식당을 열었다.
그곳에서 다시 10년 세월 향촌동을 지켰다. 도라지 위스키가 유행하던 60년대 중반부터는 술꾼들이 비어홀에서 맥주를 마시기 위해 동성로로 향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향촌동은 대학생들의 열정과 낭만의 공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이 우그러진 막걸리 잔에 시대의 아픔을 담아 마시던 70, 80년대 까지만 해도 향촌동에는 그나마 풍류의 명맥이 유지됐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향촌동은 급격히 쇠락했다. 시대의 명멸과 함께 할머니의 술집도 부침을 거듭했다.
할머니는 지금의 할매집에서 3남매를 출가시켰다. 15년전 진갑 잔치 때는 옛 단골 몇몇이 찾아와 지난 시절 외상값이라며 금일봉을 놓고가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막걸리의 향연이 사라진 향촌동 골목도 이제는 할머니의 얼굴처럼 쇠잔해졌다. 할머니의 목로주점도 스모노,오뎅, 정종이 적힌 차림표에 옛 곤도주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뿐 그 맛과 멋을 아는 사람이 없다. 술꾼들의 한없는 목마름도 이제 곤도주점 이월분 할머니의 가이없는 그리움으로만 남아있을뿐….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사진 : 50년 넘게 향촌동에서 술집을 운영해온 이월분 할머니. 이채근기자minch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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