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분꽃

지난봄 아파트 뜰에 심었던 분꽃들이 요즘 한창이다. 생장 상태가 좋은 것들은 일년초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대가 굵고 키가 큰 데다 가지들이 우북하게 벌어져서 몇 해 자란 나무 같다. 꽃송이 또한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다.

여름꽃들이 차차 사위어 가는 이맘때 분꽃은 여전히 활기차다. 조금이라도 분꽃에 눈길을 줘본 사람들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얼마나 매력덩이인가를.

분꽃은 꽃 피는 시간부터가 거꾸로다. 아침엔 연약한 듯 수줍은 듯 오므라져 있다가 햇볕이 이울기 시작하는 오후 네댓 시쯤부터 기지개를 켜며 하나둘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four o'clock'(네 시)이라는 영어 이름도 이런 연유에서일 게다. 다른 꽃들이 쿨쿨 잠든 밤에 분꽃은 활기를 되찾는다. 어둠이 짙을수록 눈이 반짝거리는 완벽한 '저녁형'이다.

게다가 색깔의 마술사이다. 분명 연노랑빛 꽃의 씨앗을 심었는데 자식 분꽃은 한 뿌리에서 노랑'진분홍'노랑과 분홍이 알록알록한 것까지 뒤섞여 있다. 신세대 분꽃인가. 멘델의 법칙을 다시 한번 공부해 봐야겠지만 여하튼 재미있는 현상이다.

또 하나, 분꽃의 숨겨진 매력은 향기다. 시골 소녀 같은 순박한 모양새와는 달리 그 내음은 그 어떤 명품 향수보다도 향기롭다. 그냥 지나쳐서는 알 수 없는 것도 묘미다. 코를 바짝 갖다대야만 느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분꽃에 향내가 있음을, 그것도 깜짝 놀랄 만큼 향기로운 내음을 갖고 있음을 모르는 까닭이기도 하다.

깊은 밤, 눈여겨보는 이 별로 없어도 묵묵히 꽃 피우고 향내 뿜어내는 분꽃을 보면 닮고 싶어진다. 언제라도 반갑게 맞아주는 고향집 누나 같고 언니 같은 꽃. 누가 보든 안보든 제 할일 수걱수걱 하는 사람이 참 소중한 존재임을 말해주는 꽃. 그런데 우리 사는 세상은 제 있을 자리에서 묵묵히 소임 다하는 사람보다 화려한 언설을 앞세우는 이, 메뚜기 튀듯 이리저리 튀는 사람에 더 눈길이 가기 쉽다.

긴 삼복도 지났다. 무더위에 지친 심신을 추스를 때다. 부지런한 분꽃은 벌써 꽃잎 떨어진 자리마다 까만 씨앗 한 알씩을 품고 있다. 내일을 향한 희망처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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