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설악산 천화대 암벽 등반

'믿음' 하나로 천 길 절벽 오른다

안전하다는 믿음 하나에만 의지해 천길 수직벽을 오른다. 2m, 5m, 10m…. 홀드(손잡이)를 잡은 손과 조그만 틈새를 딛고 선 발가락 끝에 팽팽한 긴장감이 전해진다. 오를수록 높이는 더 까마득하다. 문득 두려움이 몰려든다. "아래를 보지 말라"는 고함조차 희미해질 무렵, 슬쩍 아래를 내려다본다. 아찔한 현기증. 그럴수록 손은 오므라들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이미 자일(안전 로프)에 대한 믿음은 사라진 상태다. 올라가는 건 고사하고 손과 발을 뗄 용기조차 없다.

믿음이 사라지는 순간 이미 등반은 실패다. 로프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는 믿음, 암벽화만으로도 온몸을 지탱할 수 있다는 믿음, 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안전을 '확보'하고 있는 동료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오를 수 없는 곳. 설악산 천화대에서 인생을 배운다. 믿음을 배운다.

바위를 깎아놓은 모습이 하늘 아래 꽃밭과 같다는 천화대 리지. 공룡능선의 중간 지점인 1275봉 남쪽 아래에서 범봉과 희야봉을 거쳐 설악골 입구 좌측 능선까지 세차게 뻗어 내려온 암릉이다.

비선대 아래쪽에서 비박을 하고 새벽 5시 30분 등반을 시작했다. 초입인 설악골 입구엔 10여 명이 벌써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등 암벽등반 준비에 분주하다. 통제구역임을 알리는 입간판을 기분좋게 지나쳤다. 이미 산악회 '이산맥' 멤버들과 국립공원관리공단 설악산사무소로부터 천화대 암장 이용허가를 받아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천화대를 왼쪽으로 바라보며 설악골을 따라 오른다. 흑범·염라·석주길 가는 길이다. 험난하다. 하지만 길이 험할수록 풍경은 가까워진다.

바람이 심상찮다. 흑범길 옆쪽 능선으론 벌써 2명이 자일을 둘러메고 하산하는 중이다. 하긴 심한 바람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까지는 없다. 선등자가 첫 번째 바위에 도전했다가 얌전하게 후퇴했다. 바람이 너무 강한데다가 푸석한 바위에 확보할 위치도 마땅찮았기 때문이다. 우회해서 천화대 능선에 달라붙었다. 천화대 리지에서 보는 풍경은 올라오며 지겹도록 봐온 풍경과는 딴판이다. 이미 풍경 속에 들어와 풍경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흑범 바로 전 큰 봉우리 앞에 섰다. 바위의 갈라진 틈이 있는 왕관봉 앞의 사선 크랙이다. 내심 좀 더 쉬워보이는 트래버스(traverse:등반 중 바위를 횡단하는 것)를 하기 원했지만 바로 치고 올라간단다. 얼핏 봐도 30m 높이는 될 큰 침니(바위가 세로 방향으로 갈라진 굴뚝 모양의 넓은 틈새)가 버티고 서 있다. 위쪽에서 자일을 매고 안전을 책임지는 확보자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발끈을 조여매고 각오를 다져본다. 초반부터 쉽지 않다. 선등자들은 이곳을 어떻게 올라갔을까. 10m도 오르지 않아 몸은 한계에 부닥쳤다. 미끄러질 듯 겨우 바위에 붙어 손으로 바위를 더듬어도 매끈하다. 불현듯 미끄러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이 엄습해온다. 양손바닥이 축축해지고 팔 다리의 힘이 쭉 빠져나간다.

밑에선 "침니에서 빠져나와라" "오른쪽 무릎을 세워라" "왼손 홀드를 확인하라"고 난리다. 20여 분간 1m를 오르지 못해 "자일 당겨"를 외치다 결국 '하강'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하강도 만만찮다. 5m 정도를 남기고 더 버티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수십 길 낭떠러지 중간에 안전벨트에 의지해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 순간적이긴 했지만 다행히 아래쪽에서 자일을 잡고 있어서 우당탕탕 몸이 부딪치는 사고는 면했다. 철저하게 안전에 신경을 쓴 터라 겨우 1m정도 추락하고 다친 데도 없었지만 위쪽에서 안전을 확보하고 있는 동료는 얼마나 놀랐을까?

등반대장은 '트래버스'를 외쳤다. 몇몇 팀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어 더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우회해서 올라가 횡으로 건너간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만만찮다. 한 사람을 위해 양쪽에서 확보를 봐주어야 하기 때문. 발끝으로만 서서 그 큰 바위산을 안고 넘어가야 했다. 양팔을 벌려 홀드를 잡고 다리도 최대한 벌려야 겨우 발끝으로 설 수 있는 턱이 있다. 좀 전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 지나갔는데 신기할 따름이다. 고도감이나 두려움이 1차로 시도했다 실패한 사선침니보다 더했다. 중간중간 설치된 확보물과 안전벨트를 연결하고 한 발 한 발 겨우 정상에 오르고서야 한숨을 내쉰다. 주변 경치가 눈에 들어오는 것도 이때다. 멀리 까마득한 아래로 설악골 입구가 보인다. 저 아래 저들은 알까? 천신만고 끝에 오른 이 뿌듯한 성취감을.

하지만 그런 성취감도 오래가지 못했다. 올랐다면 반드시 내려가야 하는 법. '똥통바위'라 부르는 40m 하강길이 까마득하다. 대략 계산해봐도 아파트 15층 높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체감높이는 100m보다 더한 듯하다. 다른 팀원들의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먼저 내려가란다.

오를 땐 버벅대도 내려가는 것까지 그럴 수 없지 않으냐는 오기가 돋는다. 8자 하강기에다 두 줄을 끼우고 40m 수직 절벽에 두 발을 버티고 섰다. "발을 더 벌려" "겁내지 말고 몸을 뒤로 더 눕혀" 위쪽의 고함이 아련해질 즈음 드디어 평지에 도달했다. 비로소 살았다는 안도감이 든다.

한 번의 산행은 한 번의 인생과 닮은꼴이라 했다. 그래서 하산하는 발걸음은 많은 걸 깨우치게 한다. 자일 등 장비의 안전성에 대한 믿음, 안전을 담당한 동료에 대한 믿음, 자신에 대한 믿음없이 어떻게 바위를 타겠냐고.

〈촬영 및 취재협조:산악회 이산맥〉

글·사진 박운석기자 stoneax@imaeil.com

사진:하늘 아래 꽃밭처럼 바위를 깎아놓은 모습이 아름답다는 천화대 암벽을 타고 내려오는 산악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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