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이름과 소망

하늘은 한 포기의 풀도 이름 없이 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세상 만물에 다 이름이 붙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가? 만약에 사물에 이름이 없다면 그 혼란과 난감함은 또 어떠하랴. 이름은 하늘의 큰 은총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름은 단지 사물을 지칭하는 하나의 부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더욱 감동적이다. 그래서 이름을 지을 때는 좋은 의미와 함께 거기에 거는 기대와 소망을 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름이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개가 되는 수도 있다. 사람의 경우만 보더라도 아명(兒名)이 있고, 본명(本名)이 있고, 자(字)가 있고, 호(號)가 있다. 필명(筆名)과 예명(藝名)도 있고, 택호(宅號), 당호(堂號), 궁호(宮號)도 있고, 시호(諡號)도 있다. 종교적으로는 법명(法名)과 세례명(洗禮名)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은 태명(胎名)이라는 것도 있다고 한다. 출산 전까지 태중의 아이를 부르는 이름이다. 생각해 보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우리 두 딸의 이름을 지어 두었으니까. 우리 두 딸의 이름은 성실(誠實)이와 진실(眞實)이다. 내가 대학 시절에 중용(中庸)을 읽었을 때, '참되고 거짓 없음은 하늘의 도요,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라는 구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 있고 참된 삶인가를 느끼고, 그것을 내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첫째 둘째를 모두 딸아이를 낳았고, 장모님은 이름 때문이라며 핀잔을 주시기도 했다.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는 많고도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명이인의 경우일 것이다.

몇 년 전, 학교에서 통지표 발송을 위해 학생들에게 집 주소와 아버지 성함을 적은 봉투를 제출하게 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자기 아버지 이름 대신에 친구 이름을 적어 놓은 게 아닌가? 이 놈이 필시 좋지 않은 성적을 부모에게 보이기 싫어서 친구 집으로 우편물을 배달할 요량이라고 생각한 나는, 다짜고짜 아이를 불러서 호통을 치고 엎드려뻗쳐를 한참이나 시켰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나의 실수였다. 그 아이 아버지의 성함이 우리 반 다른 아이의 이름과 같았던 것.

나는 최근에 한국문인협회에 가입을 했다. 대구시민이면 자동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되듯이, 문학단체도 한국문인협회 대구지회 회원이면 저절로 한국문인협회 회원이 되는 줄만 알고 있었던 나는,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무슨 입회냐 싶어서 무관심하게 있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입회원서까지 보내어 주면서 권하기에 그러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회원 중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본명으로는 안 되고 필명이나 호 같은 것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등록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규정이 그렇다는 데야 어쩔 수가 없는 일. 한국문인협회 사무처에서 무슨 이름으로 할 것인가를 전화로 물어 왔을 때, 나는 '윤중리(尹中里)'로 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중리(中里)라는 이름은 어느 선배님께서 내 호라고 하면서 지어 주신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고 그 선배님은 말씀하셨다. 욕심을 버리고 중용의 삶을 살아라. 그리고 김동리(金東里) 같은 훌륭한 소설가가 되어라. 나는 이 이름이 내게는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잘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이 이름을 정식 필명으로 쓰기로 작정한 이상, 그 선배님의 뜻을 충실히 따라야 할 것이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사람이 바뀐다는 뜻이다. 이미 인생의 많은 부분을 살아버린 상황이지만, 늦다고 생각할 때가 이른 시간이라 하지 않는가. 지금부터라도 그 선배님의 소망처럼 참되고 올바르게 살며, 소설도 좀 열심히 써야 할 일이다.

윤장근 소설가·덕원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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