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자주 인용되었던 문학적인 금언 가운데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는 불가능하다'라는 말이 있었다. 나치가 아우슈비츠의 만행을 저지르는 것과 같은 시대에서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문학작품이 창작되기도 힘들 뿐더러 의미도 없다는 얘기였다.
현재 40대 중반인 우리 세대도 선배 세대에 못지않게 정치적 곡절이 만만찮았다. 대학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졌던 것만으로도 우리 세대의 정치적 민감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창 정의감이 불타오르는 젊은 영혼들에게 그것은 핏빛 화살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그무렵 막 문학에 입문한 나로서 가장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은 정치와 문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정치가 갖는 집단적인 속성과 문학이 갖는 개인적인 속성의 차이 때문이었다. 어설픈 솜씨로나마 밤을 지새워 인간의 아름다운 성품을 묘사해 놓고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왜 이런 작업을 하고 있나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내가 가꾼 '인간의 정원(庭園)'이 정치적인 폭력 앞에 초토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만 아닐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정치는 환멸을 넘어 인간의 자존과 심미를 무너뜨리는 해악에 다를 바 없었다.
그러던 정치가 희망에 찬 단어로 변화한 것은 지난 2002년 대선 전후가 아닌가 한다. 양 김씨의 집권기간을 거치기도 했지만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은 정치를 보편적인 가치로 입에 올렸다. 단기간에 인터넷으로 모여든 '노사모'도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정치가 폭력과 모욕이 아니라 떳떳한 가치로서 공론(公論)의 마당에 올라온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공이 크다고 하겠다.
어떤 이들은 노 대통령의 가장 큰 치적으로 정치의 공론화를 꼽기도 한다. 실제 '참여정부'가 개막된 뒤, 그 이름에 걸맞게 노 대통령은 수시로 직접 기자간담회를 열고 또 직접 장문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는 등 수많은 정치적 공론화를 시도해왔다. 지난 2년 반 동안 쏟아낸 대통령의 말은 이전 두 대통령의 발언록을 이미 넘어섰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정치의 공론화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하다. 처음부터 정치적인 말들이 난무하여 바람 자는 조용한 날이 없었다. 무수한 정치적인 말들은 피아(彼我) 나누는데 사용되었고 거듭된 정치적 이벤트들은 실제의 성과를 거두어들이는 것과 무관했다. 분배를 닳도록 외쳤으나 빈부의 격차는 날로 벌어졌고, 무수히 호언장담했던 부동산 정책마저, 여론조사 결과 국민들은 참여정부의 가장 큰 실정으로 꼽고 있는 지경이 되었다. 어느덧 사람들은 술자리에서마저 정치 얘기를 하는 것을 지겨워하고 넌더리를 내게끔 되었다.
어떻게 보면 정치의 공론화에 대한 감정은 동서양이 서로 다른지도 모른다. 정치제도에 대해 끊임없이 쟁론하고 투쟁하여 제도를 바꾸어온 것이 서양역사라면 동양은 제도보다 제도를 시행하는 '사람'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해왔다. 폭군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났을 뿐 정치제도에 항거해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를 가리킨다. 왕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요순시대의 평화를 정치의 이상향으로 그려오지 않았던가.
참여정부가 25일로 5년 임기의 반환점을 돌았다. 많은 사람들은 부질없는 정치적인 발언보다 조용한 실천을 기대하고 있다. 신문과 방송의 뉴스 첫머리에 정치가들의 신출귀몰한 발언들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으면 한다. 백성들을 현혹하기 위한 갖가지 이벤트, 귀를 잡아당기는 깜짝 놀랄 돌출발언들, 구현대상보다 효과를 먼저 겨냥해서 지어내는 정치적 수사들을 이제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남아 있는 현실적인 숙제들이 얼마나 많은가. 거시적인 통계자료가 이미 헛될 만큼 나라의 밑바닥 경제는 참담한 실정이다. 시끄러운 정치의 공론화보다, 남은 임기 동안 말로써 하는 호언장담보다 서민들의 등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실질적인 정책을 내놓기를 간곡히 기대한다. 참여정부의 조용한 '참여'를 소망하는 것이다.
엄창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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