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상 밖' 사람들-봉화 석포면 반야마을

태백산 동쪽 줄기 묘봉(해발 1천167m) 6부 능선에 자리잡은 경북 봉화군 석포면 석포1리는 나래기마을, 반야마을, 샘터마을로 나눠진다. 석포면에서 거울처럼 맑은 반야계곡을 따라가다 노루목재(해발 600m) 앞에 만나는 마을이 나래기마을이고 고개 너머가 반야마을, 샘터마을이다.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의 예언서 격암유록(格菴遺錄)을 믿던 사람들이 찾아와 살기 시작했다는 지상선국(地上仙國), 석포1리의 마을들은 이름들도 정겹다. '나래기'는 마을 모양이 학이 날아가는 형상이라해서, '반야'는 판판한 넓은 들이 소반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졌다. '노루목'은 고개의 모습이 노루의 목을 닮았다고해서 지어졌는데 해방 후 벌목한 춘양목을 옮기기 위해 길을 내자 고개에서 노루피가 흘러나왔다는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40여년전까지 광물과 춘양목을 실어나르던 임도를 따라 계곡을 거슬러 올라 가면 화전민들이 남긴 폐가들이 곳곳에 스산하게 남아있다. 계곡 안에 20여 가구 40여 명이 살고 있다지만 인기척을 찾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과 계곡 물소리만이 외로운 길손의 마음을 달랜다.

비경의 연속인 노루목재를 지나자 지난 96년 폐교된 반야분교가 눈에 들어왔다. 홀로 학교를 지키고 서 있는 춘양목 보호수(수령 230년)가 이 마을의 쇠락을 대변하는 듯 하다.

지금은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사실 반야마을은 춘양목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대궐뿐 아니라 나라의 귀중한 건물을 지을 때 쓰였던 춘양목을 찾아 수많은 일꾼들이 몰려들어 마을은 북적거렸다.

3대째 이 곳에 사는 마을의 터줏대감, 박정용(75) 할아버지는 "지금은 늙은이들만 남았지만 한때는 100여가구가 살았다"며 "가을철에 50여명이 두 패로 나뉘어 여물용 마른 풀을 벨 때는 장관이었다"고 추억을 더듬었다.

젊은이못지않은 기력을 과시하는 박 할아버지는 마을의 아픈 과거도 들려주었다. "68년 울진·삼척 공비 침투사건때 이 곳에 간첩들이 들어와 마을이 쑥대밭이 됐어. 주민들이 신고해서 간첩 한 명을 생포하기도 했지. 마을 예비군과 기동타격대 6명이 청와대에 가서 상금 20만 원과 손목시계를 받았다니까."

옆자리에 있던 권용대(62) 이장이 윗마을에 공비토벌작전에 직접 참여했던 심상도(68)씨가 산다고 귀띔해줘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밭에서 고추를 수확하던 심씨를 어렵지않게 만날 수 있었다.

"68년 2월 김신조 사건이 일어난 직후 예비군이 창설됐습니다. 전 분대장을 맡았었죠. 그 해 11월13일쯤 저녁을 먹다가 비상소집이 걸렸습니다. 집결지는 샘터마을이었고요."

심씨가 들려준 당시 일화 하나. 토벌이 끝난 뒤 당시 이 마을에선 집집마다 반쪽 1만 원짜리 위조지폐가 한아름씩 나왔다. 다시 만날 때 맞춰서 사용하자며 공비들이 가져온 위폐를 두 조각 내 반은 가져가고 반은 주민들에게 주고 갔다는 것.

"공비 토벌이 끝난 뒤 받은 상금 100만 원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일도 있었는데 요즘 말로 배달사고가 난 것 같다"는 말에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

계곡 물소리를 따라 윗마을인 샘터 마을을 찾았다. 마을을 대표하는 샘터는 웰빙 바람을 타고 들어온 도시사람들의 사유지로 변해 있었다.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물통을 설치해 놓아 옛모습을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작은 연못에는 연꽃이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망가진 샘터의 모습은 못내 아쉬웠다.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마을 여기 저기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다. 어둠이 내리기 전 과거 이 곳에서 광산을 운영했던 이경수(90)씨의 집을 찾았다. 광산이 있었다는 계곡 건너편 산비탈, 이 할아버지의 집 마당에는 이 할아버지의 부인 김주임(80) 할머니가 옥수수를 다듬고 있었다. 잠시 후 건장한 체격의 이 할아버지가 방문객을 맞으러 나왔다. "무슨 일이야." 낯선 사람의 등장에 깜작 놀란 모습이다.

1963년 금광을 발굴하기 위해 이 곳에 들어와 1970년까지 금광을 운영했다는 이 할아버지는 그 이후 줄곧 이 곳에 살고 있다. 슬하에 1남3녀를 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2천500평의 밭에 감자, 콩, 약초를 손수 재배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전엔 전국에 3군데나 광산을 운영했는데 폐광하거나 팔아넘겨 한 개밖에 남은 게 없어. 물 좋고 공기 좋은데 왜 떠나. 그냥 계속 여기 살 거야."

사진 촬영을 하자는 말에 김 할머니가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이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사진은 뭐하러 찍어. 머리도 하얀데 신문에 이런 사진 내면 안돼."

가까스로 사진 촬영을 마치고 길을 나서는 기자에게 할머니는 가면서 먹으라며 삶은 옥수수 한 봉지를 건넸다. 풋풋한 인심을 마음으로 느끼며 어둠을 뚫고 세상밖으로 나왔다. 봉화·마경대기자 kdma@imaeil.com

사진 : 반야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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