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늦깎이 '통기타 인생' 주부들

"나이 먹어 웬 주책이냐고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거예요. 소녀 시절엔 송창식·양희은의 통기타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렸어요. 그래도 젊었을 때는 '여자가 무슨 기타고'라며 부모들에게 머리채 다 뜯길 것 같아 못하고 결혼해서는 아이들 키운다고 못하고…. 이제 좀 짬이 나니까 배우게 된거죠." 조영순(47·북구 침산동)씨가 선수를 친다.

'막무가내(?)'로 인식되는 40, 50대의 대한민국 아줌마들이 기타를 치는 모습은 익숙치가 않다. 하지만 매주 목요일 대구동부여성문화회관 강의실에 모이는 이들은 통기타에서 팍팍한 삶 때문에 오랜 세월 잃어버렸던 삶의 고리를 발견한다.

"멋있어 보이지 않나요? 통기타 박스 들고 길을 가면 한번씩 다 쳐다봐요. 아는 사람들은 다 부러워하죠." 열심히 기타를 튕기던 김은희(44·수성구 범어동)씨는 제법 여가수 폼을 내며 말을 꺼낸다. 그 다음은 가만히 있어도 이구동성. '아파트 경비원으로부터 연주자로 기분 좋은 오해'를 받은 것(장상필·47·북구 복현동)에서부터 '동네연주회를 제의 받은 것'(김영태·51·북구 대현1동)까지 끝도 없다.

통기타를 잡은 사연도 가지가지다. 그 중 김영애(43·동구 신암동)씨의 사연은 한 편의 드라마다. "연애할 때 한번은 남편이 통기타로 '로망스'를 쳐주더라구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던지 고마 그 날로 결혼 결심을 했죠. 그 뒤 기회가 없다가 이곳에서 기타교실을 연다고 해서 첫번째로 잽싸게 등록했죠."

조영순씨는 꽹과리나 장구 치는 재미에 푹 빠졌다가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소녀시절의 아련한 기억이 떠올라 전공을 통기타로 바꿨다고 했다. 맏언니 변길량(55·여·북구 대현1동)씨의 동기는 한 수 위다. 나중에 손자를 보면 기타를 들려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서라고.

그렇다고 가정에 매인 몸인데 쉽사리 혼자 결정하기는 어려운 일. 이들 아줌마 뒤에는 역시 자상한 남편이 있었다. "남편이 이해해주지 않으면 사실 엄두내기 힘들죠. 수업은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따라가려면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거든요. 투자하는 시간이 만만찮아요."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카바레 가서 춤바람 나는 것보다야 남편으로서도 백배 낫지." 상필씨의 한마디에 깔깔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영태씨는 "처음엔 연습하는 거 보고 남편이 IQ 30이라고 놀리지 않나 이렇게 둔한 줄 알았다면 결혼도 안했을 거라고 구박해요."라며 하소연이다. 막상 배우는 건 이해해줬지만 뮤트(소리를 죽이는 기타 주법) 연습때 나는 소리는 소음에 가까웠던 것. 핀잔을 시도 때도 없이 듣는다며 모두들 아우성이다. 남편 뿐 아니라 자식들까지 구박이라고 영순씨의 딸은 "그것도 기타라고 치나. 빨리 그만두라"하고 남편이 울릉도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다는 은희씨는 "1년에 서너번 오는 남편도 틈만 나면 기타를 잡고 있는 저를 보고 기타를 부숴버린다는 둥 심한 말도 해요. 딸까지 구박을 하니 몰래 연습하는 처지죠."라고 했다.

그런 인고(?)의 세월을 겪고 3년 가까이 통기타에 매진하다보니 실력들이 수준급이다. 웬만한 포크송이나 흘러간 팝송은 다 꿰고 있단다. 은희씨는 "누가 제 연주를 듣고 양희은씨보다 더 잘 친다고 그러대요"라며 으스댄다. 그러자 상필씨가 "우리 반 아줌마들은 어느 정도 공주병이 있는게 특징"이라며 웃는다.

각종 대회에 나가서도 많은 입상을 했지만 봉사 활동도 빼놓을 수 없는 행사.

"연주할 때 노인분들이나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 거 보면 너무나 뿌듯해요." 특히 안나요양원에 갔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너무 외롭게 지낸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우리 연주를 듣고 춤도 추고 호응도 해주면서 고맙다고 할 때는 눈물까지 질끔 나더라구요."

그저 자신만을 위한 취미로 기타를 배우는 것이 아닌 셈이다. 구박하던 가족들은? 영태씨가 입을 열었다. "무슨 축하하는 날이 되잖아요. 딸이 피아노 건반을 만지면 저는 기타를 잡고 아들은 하모니카를 꺼내죠. 그러면 남편이 노래를 불러요. 완전히 가족 음악회가 펼쳐지는 거죠." 영애씨도 "기타 한가닥 치는 남편과 한번씩 듀엣도 하죠. 그러면 식었던 애정도 새록새록 피어나죠"라며 행복한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전창훈기자 apolonj@imaeil.com

사진 : 대구동부여성문화회관 앞 조그만 쉼터에 앉은 통기타반 회원들이 즉석 연주회를 갖고 있다. 처음엔 카메라를 의식한 듯 어색해하던 회원들은 이내 능수능란하게 흘러간 가요들을 맛깔나게 연주해낸다. 김태형기자 thkim21@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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