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풀벌레의 가느다란 다리 새로 오는 것일까. 아니면 작고 작은 풀벌레의 귀로 오는 것일까. 닫힌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벌레 소리. 마치 태양이 열매를 굴리듯, 거미줄 같은 풀벌레의 발가락이 소리를 굴리고 있다. 저 젖은 발가락 따라가면 우리는 어디에 닿을 수 있나. 몰래 내쉬는 낮은 한숨 같기도 했다가, 나지막이 불러보는 휘파람 같기도 한 저 소리. 벌레소리에 귀 기울이면 나도 모르게 내 몸이 작아진다. 작고 작아져서 풀 섶 어딘가로 혹은 누군가의 겨드랑이로 파고들 것만 같다.
끊어질듯 말 듯 한 소리가 어둠을 깁는 밤. 촉촉한 밤의 모서리에 기대 풀벌레 소리를 듣자. 사랑하는 사람의 어깨이거나, 꿈꾸는 아이의 이마 곁이어도 좋겠다. 잊고 지내던 그리운 얼굴이거나, 곁에 누운 사람의 베개 곁이어도 좋겠다. 살며시 가슴에 귀를 대면 평소에 듣지 못했던 소리가 난다. 어떤 말보다 깊이 내려갔다 오는 소리. 어떤 말보다 멀리 갔다 돌아오는 소리. 가느다란 다리와 작고 작은 귀가 밀고 왔을 저 소리. 오래된 서랍 속이거나, 어쩌다 넘긴 책갈피 속 빛바랜 자운영 꽃잎처럼, 저마다 잃어버린 소리가 있다. 우리에게도 저토록 여린 다리와 고운 귀가 있었다는 걸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산다.
너무 단단해진 탓일까? 풀벌레의 다리가 우리의 눈꺼풀과 콧구멍을 간질일 동안, 우리가 한 짓이란 고작 온 몸을 닫고 소리를 돌려보낸 것 뿐. 하루하루 제 키보다 높은 벽만 쌓으며 견뎌온 것 뿐. 지하 콘크리트 벽처럼 전동차 소리를 받아내며 더 단단히 굳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 단단함에 부딪쳐 수도없이 되돌아갔을 작은 소리들. 마치 맨 몸으로 시위하는 시위대처럼 너무 가벼운 몸으로 너무 무거운 것과 마주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하루살이가 불빛에 부딪쳐 떨어지듯이, 작은 소리들이 소리도 없이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다.
작은 소리들이 힘을 모아 밤을 밀고 가는 것일까. 그 소리들이 별이 되고, 그리움이 되어 새벽은 오는 것일까. 때때로 큰소리에 갇혀버리거나, 억센 손목에 끌려 구둣발에 짓밟혀 버린 순간들이 오롯이 고개를 든다. 누군가 곁에 말없이 앉아주듯, 빈 어깨에 고요히 내려앉는 손길처럼 벌레소리가 따뜻하게 번져온다. 스르륵 스르륵 제 몸 문질러 소리를 모으고 있다. 제 몸이 다 말라버릴 때까지 우리를 흔들고 있다.
비 그친 뒤 풀벌레 소리가 더 환하다. 좁고 어두운 통로로 소리가 들어와 불을 켠다. 너무 작아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꼬물꼬물 기어나와 귀를 간질인다. 왼 쪽 겨드랑이부터 실금이 간다. 누군가 가슴에 낮은 소리로 남아있기 위해, 누군가 부르는 작은 소리에 닿기 위해, 내 몸부터 균열이 가야 한다고 풀벌레가 귀뜸 해주는 밤. 이 가을에는 작고 작은 것을 지키기 위해 내 귀를 벼뤄야겠다. 여리고 여린 소리를 위해 몸 구석구석 은종같은 작은 귀를 매달아야겠다.
이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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