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의 한자-김만덕

여성 굴레 벗고 빈민 구휼에 앞장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신분적 제약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스스로 삶을 택하고,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켰으며, 적극적으로 상업 활동에 뛰어든 여인이 있었다. 삶이 극도로 제한되고 타의(他意)에 의해 결정될 수밖는 여성의 굴레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갔던 김만덕이었다.

조선 정조 때 제주도에서 태어난 김만덕(1739∼1812)은 평민 출신이었지만 어릴 때 전국을 휩쓴 전염병으로 부모님을 잃고 기생의 집에 맡겨지게 되었다. 타고난 미모와 재능을 가진 만덕은 본의 아니게 기생으로 이름이 올려지고 곧 제주에서 유명한 기생이 되었다. 당시 기생은 천인(賤人) 신분으로서 한 번 기록에 올라가면 평생 빠져 나오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만덕은 나이 스물이 넘자 관가에 찾아가 본래 양민(良民)임을 끈질기게 울며 호소해 양민으로 복귀되었다. 신분을 회복하고 나니 여기저기서 청혼을 해왔지만, 만덕은 결혼도 하지 않고 조그만 객주집을 열었다.

만덕은 장사 *手腕(수완)이 남달랐다. 객주에 출입하는 상인들을 통해 물건의 유통과정을 익히고, 육지를 출입하는 상인들에게 부탁하여 물품을 조달하고, 기생시절 경험을 살려 양반집 부녀자들과도 거래를 하였다. 변동하는 물가를 잘 이용하여 물건이 귀해지고 천해지는 때를 잘 맞추어 팔거나 쌓아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1792년(정조 16년)에서 1795년(정조 19년)까지 제주에는 계속된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는 가운데 태풍이 닥쳐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다. 관에서는 조정에 이 같은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국가에서 보낸 구호식량마저 풍랑으로 바다에 빠져 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이 때에 만덕이 천금을 내어 육지에서 곡식을 사들였다. 십분의 일은 친지에게 주고 나머지는 모두 관가로 실어 보내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조정에서 보내줄 쌀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주민들은 모두들 입을 모아 만덕을 칭송했다. 이 일이 정조에게까지 알려지자 정조는 만덕에게 소원을 물어 무엇이든 들어줄 것을 명하였다. 만덕은 "다른 소원은 없사오나 오직 한 가지, 한양에 가서 임금님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 보고 천하 명산인 금강산 1만2천 봉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당시 제주의 여자는 국법으로 육지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으나, 정조가 특별히 허락하고 한양으로 불러들여 의녀의 한 벼슬을 주고 금강산 구경을 시켜주었다. 금강산 구경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온 만덕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 갈 뜻을 전하고, 제주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장사를 하면서 남은 여생을 남을 돕는 일에 힘썼다. 당시 재상이던 채제공은 만덕의 거룩한 뜻을 담은 '만덕전'을 지어 건넸고, 병조판서 이가환은 만덕의 선행을 시에 담아 주었다. 후에 1840년 제주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는 만덕의 선행에 감동하여 손수 찬양한 글을 지었다.

만덕의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채제공의 〈번암집〉에 전하며, 제주도에서는 만덕의 높은 은덕을 기리기 위해 1980년부터 매년 1명씩을 만덕봉사상 수상자로 선정해 한라문화제(현 탐라문화제) 만덕봉제 때 시상하고 있다.

자료제공 : 장원교육 한자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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