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친일인사 명부

상업 출판사에서는 어떻게든 책을 잘 팔아보려고 여러가지 선택을 한다. 그렇지만 그 조건에 맞게 온갖 화장(化粧)을 해도 도무지 책은 움직이지 않는다. 독자가 이미 진실의 감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전 광복 60년을 맞아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이른바 '친일인사 명단'이 공개됐다. 장차 그 명부(名簿)는 어떤 식으로든 발간될 것이고, 이땅에 사는 사람 모두는 읽을 권리가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지금도 국민의 4대 의무로 모든 청년이 군에서 국가에 봉사해야 한다는 징병제를 요구하고 있다. 여성들이 듣기에 가장 재미없다는 이야기가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라는 건 이미 고전적인 상식이다.

그렇지만 그 시절 졸병들은 그때의 상관, 특히 선임하사(일제하의 오장 이하)를 기억한다. 그것도 추억이기 때문이다. 군대는 명령으로 죽고 산다. 군에서는 최고 기관이 내린 명령에 자유로운 병정이 없다. 대장이고 졸병이고 매한가지다. 특히 졸병을 독려해야 할 선임하사의 책임은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 그러함에도 일제하의 장교는 책임이 있고 오장급 이하는 책임이 없다고 명부는 선을 긋고 있다.

이런 뒤죽박죽인 가운데서도 일본 총리는 신사참배를 한다 하고 일본의 왕이라는 자는 여전히 자유롭다. 바로 그 속에서 모든 국제적 진실을 덮고 명부라는 책이 재빨리 만들어지고 있다.

아마도 그 책은 가급적 독자들에게 읽혀지지 않기를 바라지 않을까 싶다. 일제에 의해 북간도는 물론 사할린에서 하와이에 이르기까지 별리된 채 말없이 스러져간 우리 선조들 앞에서, 그 누가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무색무취(無色無臭) 무생(無生)이 아니라면. 진리보다는 멀 수 있는 것도 바로 책이다.

박상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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