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면 흔히 만날 수 있는 시내버스. 하지만 자가용을 마련하는 순간 버스는 아련한 추억의 운반자가 된다. 그저 좌석을 꿰차고 멍하게 차창밖만을 바라보던 때가 한번씩 있지 않은가. 대경버스매니아 회원들과 함께 차창밖 세상을 구경하기로 했다.
지난 주말 오후 2시 5분. 회장 백 민(16·달서공업고등학교 1학년)군에게서 연락이 왔다. "836번 출발 시간이 오후 2시14분이네요. 이 차 놓치면 2시간이나 기다려야 해요. 서두르세요." 헐레벌떡 도착한 곳은 반야월 경북교통 차고지. 백군은 "이 버스 종착지는 용연사인데요. 차창 밖 경치가 아름다워 종점 여행하기엔 그만이죠"라고 소개한다. 836번 버스는 반야월 차고지를 출발해 대구시민운동장.서문시장 등 도심을 통과해 논공 용연사까지 가는 버스.
여기서 잠깐. 대경버스매니아를 소개하면 시내버스 여행을 취미로 하는 다음 카페로 올 4월에 만들어졌다. 정회원이 15명뿐이지만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테마를 잡아 버스 여행을 즐긴다.
일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출발. 정류장을 하나둘 거치면서 텅 비었던 좌석들이 조금씩 채워진다. "이번 정류장은 방촌시장, 방촌시장입니다…"라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점점 도심에 가까워지면 익숙한 풍경들이어서 조금은 따분하다. 이때는 수다가 제격. 최재혁(14·시지중학교 2학년)군이 버스 여행의 장점을 늘어놓는다. "단돈 1천원도 안되는 비용으로 여행하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데요.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는 재미도 있고요." 류한철(14·대륜중학교 2학년)군은 "버스 여행은 혼자하는 게 제맛이죠. 막연히 버스 좌석에 앉아 혼자만의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고요."
이들은 버스 여행을 자주 하다보니 노하우도 제법 있다. "눈을 부치고 싶을 때는 내리는 문 앞뒤에 있는 좌석이 명당자리죠. 가장 덜 흔들리거든요." 백군이 말을 잇는다. "길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버스 여행이 딱이예요. 대구 지리를 손쉽게 익힐 수 있으니까요." 덜컹덜컹. 구불구불 도는 노선이 많은 탓에 몸이 쉴 틈 없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뒷좌석이라 그 강도는 더하다. 추억의 버스여행이라 참을 수밖에.
차장 밖 풍경들에 눈이 팔려있다 잠시 버스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버스 안 승객들 구경하는 것은 잔재미다. 연신 핸드폰을 주물럭거리는 남학생, 엄마 품에서 시끌벅적하게 울어대는 아기, 먼저 내린 친구에게 온갖 행동으로 작별을 하는 여학생 등. 다양한 군상들은 제각각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2시간째가 가까워지자 아파트 틈을 비집고 슬슬 푸르른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둘 사람들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우리들 밖에 남지 않았다. 버스는 길섶으로 뻗은 나무숲을 헤치더니 시야가 확 트이는 옥포의 옥연지 옆을 지난다. 이제 비로소 제대로 여행을 한다는 느낌이 든다. 한없이 반짝이는 수면에 잠시 취하다 파랗게 일렁이는 논과 한없이 새파란 하늘이 열리자 도심에서의 답답함은 이내 씻긴다. 논공의 시골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자 백군이 "과거 식구끼리 버스 타고 이곳에 와서 고기도 굽고 옥수수도 삶아 먹고 해서 참 기억에 남아요"라고 했다.
용연사 앞 계곡에는 막바지 여름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계곡 주변은 자동차들이 빼곡이 점령하고 있다. 그 곳을 곡예하듯 빠져나와 도착한 곳은 마지막 정류장인 달성군 옥포면에 자리한 용연사. 장장 2시간10분의 여정이었다. 코 끝을 간질이는 산내음과 시원한 솔바람에 흔들리는 버스에서의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듯 하다. 백군이 여행을 마무리 짓는다. "자동차 여행은 단지 목적지만을 보고 가지만 버스를 타면 구간구간 여행이 돼죠. 여정을 속속들이 볼 수 있어요. 한번씩 버스 여행을 해보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글·전창훈기자 apolonj@imaeil.com
사진 : (위)대경버스마니아 회원들이 버스 출발에 앞서 기대에 부풀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왼쪽부터 최재혁군, 류한천군, 회장 백 민군. (아래)두시간 넘게 버스 여행을 한 끝에 시내버스 836번의 종착지인 용연사 앞에 도착했다. 이상철기자 finder@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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