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대중독재의 영웅 만들기

▨대중독재의 영웅 만들기/비교역사문화연구소 기획, 권형진·이종훈 엮음/휴머니스트 펴냄

2005년 3월 16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제정 조례안을 가결했다는 소식이 타전됐다. 한국 사회는 순식간에 분노의 격랑에 휩싸였다. 국민적 공분이 높아지자 '망국병'이라던 국론 분열증은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대립도,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갈등도, 뿌리깊은 지역주의의 간극도 일본이라는 가상의 '적' 덕분에 잠시나마 말끔히 봉합됐다.

동시에 대중들이 떠올린 것은 '민족의 수호신'이자 '민족 최고의 영웅' 이순신이었다. 인터넷에는 독도 위에 광화문 이순신 동상을 옮겨놓은 듯한 합성 사진이 떠돌았다. 심지어 이순신이 생전에 가본 적도 없는 독도에 이순신 동상을 세우자는 주장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폭발적인 에너지의 이면에는 다가올지도 모를 영토 상실과 피침략의 공포, 그로 인해 히스테릭해진 대중의 광기가 놓여 있었다.

그랬다. 그들에겐 영웅이 필요했다. 영웅은 권력과 대중의 욕망이 교차하는 접점이었다. 대중은 피침략의 공포가 커질수록 역사에서 영웅을 찾고, 그의 영웅성에 기대어 공포를 극복하고자 했다. 독재자는 지배자와 영웅을 동일시함으로써 대중이 지배자를 숭배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얻었다. 더 나아가 대중들이 영웅의 영웅성을 모방하고 따라 배우면서 사회적 규범으로 체득하게 만드는 결과까지 노렸다.

근대 이전 '영웅'이라는 호칭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 중 선택된 소수의 인물에게만 붙여졌다. 영웅은 출신과 행동, 사고방식에서 일반 대중이 감히 접근할 수 없었던 초월적 존재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근대화, 식민주의가 본격화되고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대중사회'가 형성되면서 영웅과 대중 사이의 위상과 간극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파시즘 체제에서 '영웅'은 새로운 내용과 형식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대중독재의 영웅 만들기'는 그 특정 시기를 주목한다. 책은 파시즘 체제에서 '영웅'의 이미지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꼼꼼하게 파헤친다. 이순신 장군이나 잔다르크 같은 과거 영웅부터 이승복이나 나치 돌격대의 영웅으로 둔갑한 호르스트 베셀 같은 현대 영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의 영웅 숭배가 어떻게 대중들로부터 독재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했는지를 살피고 있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소장 임지현)는 이미 '20세기 독재체제는 독재자의 억압과 강제뿐 아니라 대중의 암묵적이고도 적극적인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가설을 내세워 우리 학계에 '대중독재' 논쟁을 몰고온 바 있다.

파시즘 즉, 대중독재 체제는 무수한 영웅들이 만들어지고 선망되던 독특한 시대다. 특히 대부분의 영웅이 일반 대중으로부터 출현했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윤리관을 심어줬다. 대중사회를 효율적·안정적으로 지배하고 규율화하는데 있어 이 같은 인식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책은 독일, 구 소련,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의 1930, 40년대와 동아시아(한국·북한·중국)의 1960, 70년대를 지배했던 대중독재 권력이 어떻게 평범하고 이름없는 사람들을 대중영웅으로 만들었는가를 추적한다. 나치 독일의 대중 영웅 호르스트 베셀, 마오쩌둥과 김일성 체제의 노동영웅 레이펑(雷鋒)과 길확실을 비롯 스탈린 시대의 모조로프·스타하노프·슈미트, 박정희 시대의 이승복 등은 이 시기 출현했던 대중영웅들이다. 또한 전통적인 엘리트 영웅이 어떻게 재생산됐는지도 추적한다. 나치 독일의 비스마르크 숭배와 프랑스 비시 정권의 잔다르크와 페탱 숭배, 스페인 프랑코 체제의 성녀 테레사, 박정희 시대의 이순신 등은 대표적인 예다.

책은 최근 한국사회에 불고 있는 이순신 열풍에 대해 '민주주의 시대'의 이순신 열풍은 공동체로부터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원자화된 개인들의 불안감의 다른 모습이라고 분석한다. "경제전쟁의 파고를 헤치고 대한민국을 경제대국으로 만들어줄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출현을 희망하는 대중의 욕망, 그러한 지도자의 일사불란한 지도에 기꺼이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대중의 자세가 이순신 열풍 속에 숨어있다"는 것이다.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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