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상 밖' 사람들-영주 풍기읍 삼가리 달밭마을

초가을 하늘 속에는 또 하나의 하늘이 있다. 비구름 대신 하얀 새털 구름을 발 아래 거느린 하늘은 너무 맑아 투명하기까지 하다. 정말 시리도록 푸르고 높다. 그런 하늘 밑의 소백산은 평소와 달리 왜소해 보인다.

지난달 29일 정오를 조금 넘어 소백산 삼가 매표소를 지났다. 비로봉으로 가는 등산로에 접어들자 주변 지천이 사과 밭이다. 지난봄 늦서리가 심술을 부린 탓에 흉작이 될 것이라는 얘기도 괜한 걱정이었다. 튼실히 여물어 가는 사과가 가지가 휘어지도록 달렸다. 아직은 풋 기운이 남았지만 모두 하나같이 될 성싶은 모습이다.

인기척에 뒤를 보았다. 삼베 적삼을 차려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과수원 방책 주변 등산로를 따라 올라 오고 있었다.

허리가 얼마나 굽었는지 걷는 모습이 손으로 땅을 짚고 가는 듯했다. 달밭골 사는 어른이겠거니 하고 차를 태워 모시려 청했는데 손사래를 친다.

"내래 옆 동네 장안동(골) 사는 사람이디. 이름은 이시상(89)이야. 한자는 때 시(時)자와 서로 상(相)자를 써."

억양 하나 변하지 않은 평안도 사투리에다 이름 소개도 워낙 분명해 이내 관심이 끌렸다.

"내래 고향이 평남 청천 통산면 상리야. 25살 때 이곳에 왔으니 벌써 64년이 흘렀지 뭐야. 해방되기도 전이었어. 집안 어른들이 장차 고향에 전란이 닥칠 게라며 남쪽지방 평안한 곳으로 가라기에 무작정 온 기야."

내용인즉 정감록 10승 지인 영주시 풍기읍 금계동에 안거하러 찾아 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정안골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정안골과 한 동네나 마찬가지인 달밭골, 당골 사람 상당수가 자신과 같은 이주민이라고 했다.

따져 보면 이곳 원주민과 그들 조상 다수가 정감록 신봉자들이거나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난리통에 세상을 버리고 온 사람들이다. 산중 마을이 형성되고 사람들이 모인 주 내력이다.

"당시 기차를 타고 풍기역에 내렸어. 살림살이라야 솥과 밥그릇 몇 개, 괭이와 삽이 전부였어. 개간도 하고 돈이 모이면 밭도 사, 한 때는 서숙 15가마에 밀 10가마를 거두고 누에치고 소먹이는 남 부럽지 않은 농군이었디."

40분을 걸어 비로사 앞 공터 우측으로 난 달밭골 입구에 다다랐다. 이곳에서 비로봉까지 오르는 데는 1시간 30분이 걸린다. 온갖 나무들이 무성히 들어서 하늘을 덮어버렸다. 무뎌진 오감을 일깨우는 싱그러운 솔내음이 그윽하다.

얼마 가지 않아 민가를 만났다. '달밭골 민박' 이 마을 터줏대감 최현관(67)씨 댁이다. 한국전쟁 직전 풍기읍 교촌리에서 어른들을 따라 들어와 50년 넘게 이곳에서만 살았다.

"먹고 살려고 이곳에 왔는데 정말 고생만 했다오. 메뚜기 이마 같은 화전(火田)에다 옥수수 감자 약초농사가 전부였고 쌀밥을 제대로 먹은 것이 고작 10여 년 됐으니 알만하겠지. 한 때 50호까지 주민들이 살았지만 형편은 같았어."

하지만 아들 4형제 모두 대학공부 시켜 듬직한 사회인으로 키웠으니 헛된 고생은 아니었다고 한다. 또 이런 보람은 자신의 노력보다는 소백산자락이 베푼 은혜라며 감사해 한다. 순박하고 어진 산중 사람 그 자체였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안달밭골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솔길은 벌써 구절초와 쑥부쟁이 꽃으로 한껏 가을치장을 했다. 알아주지 않을세라 어른 키만큼이나 멀쑥하게 자란 억새풀이 허리를 일렁거려 보인다.

산중에 말끔하게 신축한 집 한 채가 있다. 이창주(60) 처사(동네 사람들이 이렇게 부른다) 내외가 사는 곳이다. 본래 서울 사람들인데 산이 좋아 일찍 도시생활을 접고 대학시절 산행 와서 인연 맺은 이 곳으로 10년 전 옮겨 왔다.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무척 당황스러웠다. 이 처사가 오른쪽 다리를 잃은 채 휠체어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3년 전 간벌하다 나무둥치에 맞아 다친 발등의 상처가 악화돼 그렇게 된 것. 새집도 불편한 몸을 추스르려 지난해 지었다.

"남편이 거동하기 어려워져 이젠 혼자 농사를 짓지요. 산간 밭이 3천 평이나 힘이 달려 절반만 부치지만 그마저도 멧돼지며 고라니들이 다 먹고 남는 것을 거두니 농사랄게 있나요." 부인은 도무지 욕심이라고는 없는 사람 같았다.

같이 자리를 하던 중 이 처사는 입 뗄 때마다 참선과 명상의 의미를 얘기하고 수시로 행하여 마음의 때-사욕에서 벗어 나라고 당부했다. 이는 자신의 산중생활 목적이자 의미이기도 하다고 했다.

마땅히 한 몸 의탁할 것이 없어 어둑어둑해 하산, 삼가동에서 눈을 붙이고 다음날 오전 다시 달밭골을 찾았다. '산골민박' 김순종(75) 할아버지 집이다. 할아버지는 혼절한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와병 중이었다. 병수발하러 제천에서 온 딸(45)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서려 있다.

"어머니도 몸이 아파 도시 병원에 입원한 터라 함께 도회지로 모시겠다고 해도 한사코 싫다 하세요. 고집스럽게 지켜 온 고향을 등지지 않겠다고 작심하신 분입니다."

다시 주변 집을 찾아다녔지만 더 이상 마을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송이를 따거나 읍내로 볼일 보러가 마을이 텅 비었다. 정말 달밭골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마음 씀씀이나 자연에 순응하고 달관하며 사는 모습들이 마치 도인 같다.

하산길 그들을 떠올리며 수도 없이 자문자답했다. 어떻게 세상을 살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부끄러웠지만 새로운 다짐이 있었기에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뜻 깊었던 초가을 산행이었다.

안동·정경구기자 jkgoo@imaeil.com

사진1 : 해방전 월남해 달밭골 옆동네 정안골로 들어온 이시상 할아버지는 과거 어렵던 시절에도 자족하며 살았던 산촌생활에 후회는 없지만 죽기 전 고향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사진2 : 달밭골 터줏대감 최현관씨 부부는 최근 풍기에서 미장원을 개업한 둘째 며느리를 도와 주기 위해 산골로 데려온 어린 손자 재롱에 새로 살맛이 난다고 말했다.

사진3 : 주변의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 만든 달밭골 화전민들의 주택 창고.

사진4 : '산골민박' 김순종 할아버지댁 마당 한쪽에 있는 무쇠솥과 장독대가 한적한 산촌가옥의 정취를 더해준다.?안동·정경구기자 jkgo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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