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꽃 활짝 핀 칠곡 가산 종갓집

"딸이냐고요? 며느리들이에요"

"명절이 너무 기다려져요. 온 가족이 모여 즐겁게 웃고 떠들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정도예요."

추석 준비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는 주부들이 많지만, 김종한(80·칠곡군 가산면 금화리)씨 집 며느리들은 "명절은 고된 노동절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기다려지는 날"이라고 입을 모은다.

명절까지 제사가 1년에 10번인 종가. 음력 12월에는 1주일에 제사가 3일이나 있는 제사 주간(?)도 있다. 제사는 꼭 자정이 넘어 지내니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새벽 3, 4시가 넘곤 한다. 1년에 가족 생일이 12번, 제사가 드문 여름에도 삼복(三伏)과 휴가까지 일일이 어른을 찾아뵈어야 하는데 이런 일들이 즐겁다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주부들도 있을 듯싶다.

"첫 아이를 가져 8개월까지 부른 배를 하고서, 등 뒤로는 어려운 시댁 식구들의 눈길을 느끼며 혼자 제사상 앞에서 큰절을 해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4남1녀 중 막내 며느리인 김경숙(38·대구시 욱수동)씨는 "결혼해서 처음 맞은 추석날, 시누이 가족이 올 때까지 친정에도 못 가고 슬퍼서 냄새나는 재래식 화장실 안에서 엉엉 울었다"고 되돌아보았다.

둘째 며느리인 김경애(43·구미시 진평동)씨는 "외동딸로 자라 밥 한 번 안 해보고 결혼했는데 처음 6개월간 시집살이를 하면서 지나가는 쥐에 놀라고 밤마다 달 보며 울었다"고 했다.

그런데 시부모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며느리들의 표정은 어둡기는커녕 밝기만 했다. 모두 좋은 추억거리로 남아있다는 이야기였다. "4, 5년쯤 됐을 거예요. 아버님께서 폭탄 선언(?)을 하신 것이…." 완고해 보이는 시아버지가 제사를 줄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너희 어머니의 건강도 예전 같지 않고 며느리들도 직장일 한다고 힘든데 더 이상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 아이들도 중고생이 늘어나고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으니 제사 시간은 변함이 없으나 제사를 줄이겠다…."

남편들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제사가 끝나면 남자들이 설거지를 맡고 커피 배달 서비스까지 제공한다. 나물을 다듬고 꼬치를 꿰고 송편을 빚는 일도 마다 않는다. "뭐 도울 일 없습니까?" 퇴근 후 집에 들어서자마자 네 형제가 똑같이 이말부터 먼저 꺼낸다.

이런 아들들을 보며 어머니 김옥이(73)씨는 "많이 거들어 주라"고 권한다. "6남매 맏이로 시집 와 5대봉사 다 지내고 시어른 모시며 살았지만 영감님은 여자 일을 몰라. 시대가 변했으니 며느리들도 호강 좀 해야지…."

형제애가 남다른 이집은 동서 사이도 각별하다. 전 굽고 나물 볶고 차례 음식을 준비하면서 웃고 떠들 얘기가 어찌나 많은지 잠시 조용할 틈이 없다. 차례 준비를 끝낸 후 여유 있게 고스톱도 치고 노래방에도 가고 동서끼리 즐거운 시간도 보낸다. 큰돈 들이지 않더라도 친정에 가져갈 선물까지 챙겨주고 서로 배려하고 관심을 보이는 일이 일상사가 돼있다.

"모두 아버님, 어머님이 잘 하시기 때문이에요. 며느리를 소중하게 여기시고, 명절 지낸다고 수고했다고 2만5천 원씩 며느리들에게 보너스를 주실 때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공평히 하시거든요."

셋째 며느리 서민희(39·대구시 지산동)씨는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을 가지다 보면 동서끼리 섭섭한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서로 배려하며 먼저 나서서 일을 챙기고, 남편과도 서로 시댁 친정을 먼저 생각하며 더 잘 해주려 애쓰게 된다"고 했다.

"많은 가족이 모여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힘든데 우리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좋아하고 사촌들과 의좋게 지내며 즐겁게 뛰어 노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며느리들은 명절에 나물을 다듬든, 전을 부치든, 윷판을 돌리든 간에 아내와 남편, 할아버지와 손자, 사촌들과 함께라면 어떤 시간도 즐겁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김영수기자 stella@imaeil.com

사진: 추석을 앞두고 김종한씨 집 세 며느리가 한자리에 모였다. 서로 배려하는 마음만 있으면 명절은 고된 노동절이 아니라 함께해서 기쁜 날이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정우용기자 sajahoo@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