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태풍 휩쓴 가을 들녘...넋 잃은 농민들

'나비'가 논·밭을 쑥대밭으로…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가꾼 사과인데 한 번도 아니고 한 달 새 두 번씩이나 쑥대밭을 만들다니…"

6일 오후 4시 초속 20m 이상의 강풍이 불어닥친 의성군 옥산면 오류·금봉·금학리 사과농가들은 만신창이가 된 사과밭을 보고는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일부 사과나무는 뿌리째 뽑혀 넘어져 있었고 붉은색 사과들은 땅에 굴러다녔다.

지난달 15일 국지성 폭우와 돌풍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 또다시 피해를 입은 김영진(65·의성군 옥산면 오류리)씨는 "이틀 후에 수확할 예정었는데 사과밭 3천500평이 완전히 망가졌다"며 "추석이고 뭐고 이제 다 살았다"고 허탈해했다.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가족들과 함께 하나의 사과라도 건지기 위해 수확에 나선 김동환(59·의성군 금학리)씨는 "인력이 부족, 사과를 다 수확할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여야않겠느냐"며 "태풍이 원수"라고 울부짖었다.

동해안에서 가까운 고경면과 북안면에 피해가 집중된 영천에서도 농민들의 탄식은 쏟아졌다.영천시 고경면 청정리에서 배농사를 짓는 문정현(72)씨는 수확을 앞둔 배가 모조리 땅바닥에 떨어진 광경을 보고 넋을 잃었다. 2천여 평의 과수원 90%가 6일 오후 불어닥친 강풍에 못쓰게 된 것. 그나마 나무에 매달린 배도 상품성이 떨어져 올해 농사는 완전히 망쳐버렸다.

문씨는 "태풍이 일본 쪽으로 치우친다기에 어제 두 고랑을 따다가 말았는데 이렇게 한 톨도 남김없이 완전히 낙과가 될 줄 몰랐다"며 "올해는 일조량이 좋아 지난해보다 높은 가격을 기대했는데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고 낙담했다.

인근 오룡리에는 수확을 앞둔 벼 절반 가량이 쓰러지는 피해를 입었다. 이장 이상일(62)씨는 "당장에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침수피해까지 당할 우려가 있다"면서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 판에 태풍으로 이중고를 겪게 됐다"고 말했다.

청송군에서도 부동면에 130mm의 폭우가 쏟아진 가운데 농경지 200여ha가 침수피해를 입었고 과수원 피해도 컸다.8천여평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 임재달(66·청송 부동면)씨는 "초속 25m 이상의 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수확을 앞둔 사과밭 1천900여평이 낙과피해를 입었다"며 "추석대목은커녕 밀린 인건비도 지불하기 힘들게 됐다"고 말했다.

'영덕 꿀배'로 유명한 영덕군 병곡면 각리와 원황리 주민들 역시 7일 아침 눈 앞에 벌어진 피해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날 오후까지만 해도 나무 끝에 주렁주렁 달려 있던 황금색 배가 밤새 모두 떨어진 것을 보고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던 것.

각리 이장 남부진(58)씨는 "6일 오후 6시부터 세시간 동안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비바람이 휘몰아치더니 이 모양이 됐다"며 "일년 동안 얼마나 애지중지 매달린 수확물인데....."라고 말을 잇지못했다.낙과를 모으고 있던 농민들은 "지금 줍는 것은 과일이 아니라 돌"이라며 "신고품종 등은 그냥 놔두면 썩기 때문에 모두 땅에 파묻어야 한다"고 애통해했다.

이틀 동안 567㎜의 폭우가 쏟아졌던 양북면 등 경주시내 곳곳에서도 떠내려간 전답을 바라보는 농민들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특히 심한 피해를 입은 양북면 용동리, 호암리, 안동리, 입천리 등지는 농민들이 허탈한 표정만 지을 뿐 복구의 일손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양북면사무소 윤대전 계장은 "피해집계에도 제외되는 50평 이하 소규모 전답피해까지 합치면 실제 피해는 더욱 늘 수 있다"며 "대부분 일흔이 넘은 노인들이 지은 농사가 떠내려 가 더욱 안타깝다"고 했다.

형산강 하류에 가까운 천북과 강동면 지역의 경우 물빠짐이 늦어 벼목까지 차오른 물이 빠지지 않고 있다. 한 공무원은 "'나가봐야 뭐하냐'며 아예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농민들이 늘면서 방치된 곳도 많다"고 전했다.

태풍 루사와 매미때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안동에서도 태풍이 남긴 상처는 컸다. 안동시 길안면 구수1리 김종진(65)씨는 "봄 늦서리 피해로 평년보다 결실률이 40% 이상 낮은 상황에서 태풍피해까지 입어 올 가을에는 거둬들일 것이 없는 실정"이라며 "나무가 뿌리째 뽑히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만 한해라도 풍수해 겪지 않고 농사지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반면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난 경산과 울진지역에서는 가벼운 낙과피해만 나 농민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6천여평의 대추농사를 짓고 있는 송재준(59·경산시 대정동)씨는 "태풍 영향으로 600평 기준 6~8상자(상자당 23∼25kg) 정도의 낙과피해를 입었지만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말했다.

안동·정경구기자 jkgoo@imaeil.com 경주·박정출기자 jcpark@imaeil.com 울진·황이주기자 ijhwang@imaeil.com

청송·김경돈기자 kdon@imaeil.com 의성·이희대기자 hdlee@imaeil.com 경산·김진만기자 factk@imaeil.com 영천·이채수기자cslee@imaeil.com

사진: 영천시 고경면 청정리 문정현씨의 과수원에 달려있던 배가 강풍에 의해 대부분 낙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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