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 브랜드가 홍수다.
엇비슷한 브랜드가 너무 많아 생산자도 공들여 만든 브랜드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많다. 우리 농촌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소비자가 믿고 선택할 수 있는 브랜드 정비가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을 정도다.
◇의성
군내 쌀 브랜드는 70개가 넘는다. 농협 미곡종합처리장(RPC)에서 시작한 쌀 브랜드는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3, 4개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쌀 브랜드가 봇물을 이루면서 RPC 브랜드만 25개로 불었고, 최근에는 영세 정미소들도 가세하고 있다. 브랜드가 아니면 유통 시장 진입조차 힘겨워 50개 이상의 정미소들이 자체 브랜드를 경쟁적으로 시장에 내놓고 있는 것.
쌀 브랜드 홍수의 크고 작은 부작용도 적잖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소비자 혼란. 의성 쌀 브랜드 중 '안계'가 들어가는 브랜드만 절반을 넘고 있다. 안계 평야의 '안계'는 전국적으로 브랜드 인지도가 높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황토쌀 열풍이 불면서 '황토'가 들어가는 쌀 브랜드도 20개 넘게 생겼다. 하지만 안계미, 황토미 생산 면적은 각각 1천㏊도 넘지 않는다. 이 면적으로는 시중에 나도는 안계미, 황토미 이름을 단 브랜드 유통량을 절대 맞출 수 없다는 것.
주부 김유성(45·여·수성구 만촌동)씨는 "이름은 엇비슷한데 맛과 품질은 제각각이라 도대체 어떤 쌀을 믿고 사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안계진품미를 생산하는 이병훈(42)씨는 "시중에 나도는 안계미 중에서 진짜 안계미는 10종류를 넘지 않는다"며 "아류작들이 나돌면서 진짜 안계미까지 꺼리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농가들은 '의성' 브랜드지만 경북의 타 시·도는 물론 전라도, 강원도 쌀까지 섞어 파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대형 유통점들의 상술을 문제삼는 농가들도 많았다. 쌀은 누구나 사먹는 생필품이기 때문에 품질별 가격차가 크지 않은데, 대형 유통점들은 품질이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큼 마진이 많이 남는다는 이유로 브랜드 선별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것.
농가들은 "대구의 대형 유통점들만 해도 전국적으로 60개 이상의 황토쌀을 거래하고 있다"며 "대형 유통점들이 품질 구별 없이 마구 사들여선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상주
'곶감 90개, 배 40개, 포도 20개'. 상주에서 생산하는 농산물 브랜드의 현주소이다. 그야말로 브랜드 무풍지대.
곶감은 알려진 브랜드만 90개 이상이다. 농가들은 자체 상표와 유통망으로 인터넷, 우편, 택배 등으로 거래를 뚫고 있다. 일부 브랜드는 고정 판매처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브랜드가 너무 많아 신뢰도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
배 역시 작목반, 읍·면 지역별로 각기 다른 브랜드를 내놓고 있다.
상주 외서농협 김광출 전무는 "상주배는 전국적으로 유명하지만 브랜드마다 품질이 다르고, 브랜드 이기주의가 만연해 통합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상주 포도는 서울, 수도권 농산물 시장과 대형 유통업체로부터 상품성을 인정받아 다른 지역보다 배 이상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20개가 넘는 브랜드가 속속 생겨나 기존 브랜드 가치 하락은 물론 소비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백화명산포도 황의창 대표는 "농협 계통출하를 통한 포도 연합판매를 해야만 상주 포도의 전국적인 명성을 이어갈 수 있다"고 했다.
◇사과도 헷갈려
사과 주산지인 영주, 청송, 안동의 사과 브랜드는 몇 개일까. 이들 시·군의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추산한 결과 개별 농가 등 크고 작은 브랜드까지 합하면 100개나 됐다.
영주, 청송, 안동 지방에서 나오는 사과이지만 지자체 이름, 지명에 따라 수십 개로 나뉘고, 저마다의 재배 방식 등에 따라 또다시 수십 개의 브랜드가 태어난다. 소비자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청송군에 따르면 사과 브랜드는 파악 가능한 브랜드만 14개 정도. 군이 1994년 '청송사과'라는 이름으로 상표 등록을 했지만 청송사과를 그대로 쓰는 곳은 없다.
2천여 호에 이르는 농가들은 청송사과에다 '꿀', '태양과 바람', '껍질째 먹는', '솔', '얼음골', '주왕산' 등 별도의 이름을 넣고 있다.
영주시 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전국에서 사과 생산량이 가장 많고, 그만큼 크고 작은 브랜드도 50개를 넘나든다. 부석면에만 16개의 브랜드가 있다"며 "영주를 대표하는 선비촌이라는 브랜드가 있지만 이를 쓰는 사과 브랜드는 4개뿐"이라고 했다. 영주 역시 농가마다 품질과 유통 경로가 서로 달라 자체 브랜드를 개발, 시중에 내놓고 있는 것이다.
안동에도 수십 개의 사과브랜드가 경쟁 중. 대형 유통점과 거래가 가능한 사과브랜드는 고작 3, 4개로 대부분의 영세 브랜드들은 중·소 상인들의 요구에 맞춰 브랜드를 새로 만들어 내놓고 있다는 것.
안동 사과 농가들은 "지난해 안동 e마트 개점 이후 농산물 수요가 늘어나면서 개별농가들은 또다시 3, 4개의 신규 브랜드를 준비 중"이라며 "통합 논의를 하고 있지만 품질 및 브랜드 이름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기획탐사팀=이종규·이상준기자 사회2부=정경구·이희대·김경돈·마경대·엄재진기자
사진설명>소비자가 대구 시내 한 대형소매점에서 쌀을 고르고 있다. 소비자들은 쌀 브랜드가 너무 많아 어떤 제품을 골라야 할지 고민할 때가 많다. 이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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