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회의는 진행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나폴레옹 몰락 후인 181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럽 90개 왕국과 53개 공국(公國) 대표가 모여 유럽 재편 문제를 논의하는 대규모 국제회의를 열었을 때 오스트리아의 장군 폰 리뉴가 지지부진한 회의 상황을 빗댄 말로 요즘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강대국들 대립으로 회의가 진전되지 않고 약소국들은 논의의 뒷전에 밀리자 회의를 주최한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경쾌한 왈츠곡이 흐르는 무도회를 자주 열어 각국 대표들을 달랜 데서 이 말이 유래됐다.
회의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 같은 존재다. 형식 또는 겉치레에 그치거나,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하게 끝나는 회의는 회의(懷疑)만 불러올 뿐이다. 반면에 참석한 이들의 아이디어와 창의성이 분출되는 회의는 성공을 '담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대구경북 CEO들도 결실있는 회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저마다 독특한 회의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편지로 의견 주고받아
경쟁력 있는 회사가 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가 '살아있는 커뮤니케이션 문화'라는 제진훈 제일모직 대표. "의사결정을 신속히 하기 위해선 상하간 의사소통이 물 흐르듯 원활해야 하고, 실시간으로 모든 정보를 공유해야 합니다. 이런 조건을 충족해야만 급변하는 기업환경에서 시의적절하고 정확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지요."
딱딱한 회의 탓에 자유로운 의견이 교환되지 않아 소중한 아이디어나 현장의 소리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제 대표는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유도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전달의 업무를 분석하는 월례회의엔 맥주, 음료수, 다과 등을 준비해 직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특히 '임직원과 늘 함께 호흡한다'는 모토를 실천하기 위해 제 대표는 매월 초 사내 통신망을 통해 CEO 메시지를 발송하고 있다. 특별한 형식 없이 경영 현안과 임직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A4용지 5, 6쪽 분량으로 허심탄회하게 써내려간 편지다.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든 사원이 공유하고, 공동 목표를 향해 전력을 기울이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편지를 보냅니다." 회사 목표와 경영현안에 대한 CEO 편지를 받은 임직원들은 자신의 의견이나 건의사항을 답장으로 보내면서 최고경영자와 사원들이 자연스럽게 교감하고 있다는 얘기다.
◆"계급장 떼고, 논리로 회의한다"
게임업체인 KOG를 이끌고 있는 이종원 대표의 회의방식도 독특하다. "회의 때는 직급·직책을 떼고, 논리와 합리로만 이야기하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일단 회의에 들어온 사람들은 자신의 논리로 이야기를 하게 합니다." 칠판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KOG 회의의 특징. 다른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칠판에 내용을 적으면 더욱 논리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대아산업 등 4개 회사를 경영하며 구미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는 박병웅 대아산업 대표는 최대한 직원들 의견을 많이 듣고 난 뒤 결론을 찾는다. 생산공장이든 사무관리분야든 현장 직원들이 해답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믿음에서다. "직원들이 창의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회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족과 대화하는 것처럼 유도하지요."
레미콘업체 등을 경영하며 경북경영자총협회장을 맡고 있는 김영석 대영산업 대표 역시 직원들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난상토론을 유도하고 있다. 이를 충분히 경청하고 난 뒤 최종 결정 때 직접 조정·조율하는 식으로 회의를 이끌어가고 있다. 우수한 아이디어가 나오면 전체 회식을 시켜주고, 좋은 아이디어를 낸 부서에는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연극 티켓을 주는 등 '보상제'를 채택한 데서도 김 대표가 회의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키폰 회의, 화상 회의
한삼화 삼한C1 대표 역시 회의에 큰 의의를 두고 있다. "잘 하는 회의란 정직과 신뢰 속에 각자의 무한한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이지요."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팀별 책임제로 회의를 운영하며, 참석한 사람 모두가 의견을 내도록 해 모두가 공감하는 해답을 찾는 데 노력하고 있다. 한 대표는 "임직원들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는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 경영자로서 회의에 임하는 역할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최영수 책임테크툴 대표는 오래 전부터 전화로 직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몇 명이 모여 회의를 하다 느닷없이 밖에 있는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스피커폰을 통해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처음엔 갑자기 전화를 받은 직원이 당황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즉흥적으로 던지는 질문에도 일목요연하게 대답을 잘합니다." 재작년부터는 3명 이상 한꺼번에 통화할 수 있는 키폰 회의시스템을 도입, 회의를 하고 있으며 서울-대구 간 회의는 화상으로 하고 있다. "주로 질문을 던지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의견을 유도합니다. 직원들에게 적당한 긴장감을 주면서 생산적인 회의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상락 HA코리아 대표는 매주 각 부서의 업무에 맞는 주제를 선정, 그 부서원들이 다른 부서원들에게 브리핑하는 형식으로 회의를 진행하며 여러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영업부가 시장·제품 동향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면, 영업부가 아닌 다른 직원들이 질문을 하면서 제품의 컨셉을 정하는 식이다. "업무가 달라도 직원들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내게 하다 보면 그 중에 진주알 같은 아이디어가 나오게 됩니다. 이런 회의 방식을 통해 채택된 아이디어들이 모여 탄생한 제품 중 하나가 세계 각국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일체형 DVR이지요." 부서별 발표회의는 다른 부서원들 고충을 알게 하고, 서로 이해할 수 있게 해 부서 간 업무 협조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회의를 줄여라
구정모 대구백화점 대표는 회의시간을 최대한 짧게 잡고, 그 시간에 맞추도록 하고 있다. 회의 시간을 정해놓지 않고 회의를 진행하다보면 회의가 길어지고 생산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아 시간만 낭비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판단에서다. 또 회의 의사록을 반드시 작성토록 해 참고로 하거나,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고 있다.
특히 회의를 통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되면 그 결정을 좀처럼 번복하지 않는다는 게 구 대표의 소신. "결정이 잘못됐더라도 그대로 따릅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게 되고, 그것은 다음 번 회의에서 수정됩니다. 다만 결정된 내용이 부정적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엔 다시 회의를 열어 잘못된 결정을 지체없이 폐기하지요."
장병조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전무(공장장) 역시 회의 시작 전 종료시각을 정해놓고 회의를 진행한다. "가급적 제 이야기는 회의 말미에 짧게 하고, 다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도록 토론을 통해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보고가 필요하면 구두나 간단한 메모가 더욱 효율적이라는 게 장 전무가 내린 결론.
최재원 모다아울렛 대표 역시 회의를 위한 회의는 매우 싫어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최대한 짧게, 가능한 팀워크를 위한 회의가 되게끔 진행하고 있습니다. 수직적 사고가 아닌 수평적 사고를 강조하고, 직원들 이야기를 경청하도록 노력합니다. 젊은이들이 우리의 아이디어 뱅크라는 신념 때문이지요."
이대현기자 s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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