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토요오픈)빛바랜 대구 차이나타운

9일 오후 대구 차이나타운. 대구 중부경찰서와 만경관, 약전골목으로 이어지는 이 거리에서는 화교초등학교와 '화상(華商)' 간판을 단 3곳의 중화요리점을 빼면 그 어디에도 옛 차이나타운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었다.

6·25 직후 화교(華僑·외국으로 이주해 정착한 중국인이나 그 자손)가 운영하던 포목점과 중국음식점 등이 즐비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화교의 수가 급격히 줄면서 중국인 거리도 그 활기를 잃었다.

올해는 화교가 대구에 정착한 지 꼭 100년 되는 해이다. 현재 대구에 거주 중인 화교는 모두 1천 명 남짓. 한국전쟁 직후 3천700여 명에 달했지만 이제는 대만 등지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그 수가 크게 줄었다.

대구화교협회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한 노인이 돋보기로 자기 여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 나이 일흔인데 아직 경로우대증 하나 없어요. 젊었을 때 중국집, 중국식료품점도 경영하면서 한국사람과 똑같이 세금 내고 살았는데 복지혜택은 전혀 못 받고 있어요. 그래서 화교들이 많이 떠날 수밖에…."

그는 "이 화교거리에 한 10가구 정도 남아 있을까, 다 뿔뿔이 흩어져 살거나 미국, 대만으로 옮겨갔지"라고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재일한국인의 지위를 얘기하는 한국은 과연 한국 속의 화교들에게 어떤 대우를 하고 있는 걸까.

이곳에서 한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중국인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1950년대 중국빵집, 만두가게, 중화요리전문점, 잡화점, 의류점, 중화요리 관련 식재료점이 죽 늘어섰던 이 거리에는 굳이 한국어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화교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나이 든 사람을 제외한 화교 2, 3세는 이곳을 떠나고 있다.

대구에 살고 있는 화교들은 영주자격을 기준으로 2004년 말 현재 950여 명, 경북은 490명이다. 전국 2만여 명의 화교 가운데 서울(9천221명)과 인천·경기(4천823명), 부산·경남(2천302명) 다음이다.

협회에서 소개한 중국음식점을 찾았다. 그나마 한국어를 구사하는 화교 3세가 운영하고 있는 화상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경미반점'의 주인 형유미(邢有薇·37·여)씨는 곧장 화교가족들의 얘기부터 꺼냈다.

"시아버지(80)로부터 가게 벽돌을 빼서 거기에 돈을 넣어두던 일, 돈을 모아둔 단지를 땅에 묻었다는 등 옛날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박 대통령 시절엔 금융 거래가 안 되니까 그 수밖에 없었대요. 3년 전 화교에게 영주권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F2(장기거주 외국인) 신분이었잖아요."

형씨는 어릴 때 '되놈, 되국년'이라고 놀리던 한국 초등학생과 싸우던 얘기도 꺼냈다. 또 불과 4, 5년 전 20만 원의 계약금을 걸고 휴대전화를 개통해야 했고, 인터넷 전산망에 주민번호를 쳐도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고 경고창이 뜨는 등 '이방인'의 설움을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중화요리점 '천안성'의 왕혜연(46·여)씨는 "뼈가 쉽게 부스러지는 병을 앓아 장애인 등록을 하러 갔지만 동사무소에서 '외국인에게 장애인증을 발급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면서 "한국인과 똑같은 세금을 내고 살아도 우리는 영원히 이방인"이라고 말했다.

대구화교협회 소상원 회장은 "대구에 화교가 정착한 지 올해로 꼭 100년째"라며 "대구에 남아있는 화교들은 현재 1천명 남짓 되지만 과거에는 대구 사회의 한 축을 이룰 만한 상권을 형성했고 지금도 화교 초·중·고교를 운영하며 중국인의 정체성을 지켜가고 있다"고 말했다. 서상현기자 ssa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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