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종가 사람들/이연자 지음/랜덤하우스중앙 펴냄
민족 대명절 추석. 해마다 추석이 되면 많은 가정에서는 차례상에 올릴 음식 준비로 분주해진다. 햅쌀로 빚은 송편과 햇과일, 육적(구운고기), 어적(구운 생선), 소적(두부 부침) 등 적과 전, 삼색나물, 포, 식혜 등 갖가지 차례 음식들이 한상 가득 차려진다. 차례상에서 음식 준비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진설'이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좌포우혜, 어동육서, 두동미서, 건좌습우, 우반좌갱 등 요즘 세대들에겐 생소하기 그지없는 용어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명절이 되면 제례 용어와 상차림에 대해 알아보려는 네티즌들의 손길로 인터넷이 바빠지는 이유다. 그렇다면 1년에 12번의 기제사와 설·추석 차례, 가을 시제 등 다달이 제사를 올리는 종가의 추석 차례 풍경은 어떨까.
경북 김천의 연안 이씨 정양공 이숙기 종가에서는 설·추석에 조상의 신주 앞에 각각 술 한잔과 차 한잔, 과일 한 그릇을 올린다. 간소하고 간결한 제상 차림이다. 더구나 제사상에 올리는 과일을 두고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시비를 하지 않는다. 제례법은 200여년전인 조선 후기 가가례(家家禮)를 없애고 관혼상제의 사례(四禮)를 통일하기 위해 펴낸 '가례증해'(家禮增解)'에 따른 것. '가례증해' 어디에도 과일 이름을 적어둔 곳이 없다.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보충하고 해설한 이 책은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이의조 선생, 종손의 종 8대조가 펴냈다.
또 박문수의 불천지위(不遷之位)를 모시는 고령 박씨 충헌공 박문수 종가에서는 제상에 떡이 오르지 않는다. 백성들이 힘들여 농사지은 쌀을 한 톨도 축내지 않으려 했던 암행어사 박문수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다. 제주인 박용기씨는 노론·소론의 치열한 당쟁으로 생겨났던 다양한 제사 방법을 굳이 이어받을 필요가 있겠냐고 말한다. "제사의 큰 줄기는 정신입니다. 조상을 기억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친지들을 만나면서 핏줄을 확인하는 축제 같은 자리가 바로 제사가 아니겠습니까."
'명문종가'는 고색창연한 건물만 남은 문화재가 아니다. 종가의 꼿꼿한 자존심과 선비 정신은 수백년의 세월을 넘어 전통과 품격을 지켜온 힘이다. 종가에는 역사와 세월을 아우르며 자존심을 지켜온, 족보가 아닌 조상의 기개를 자랑스럽게 간직한 종손과 종부가 살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선인들의 숭고한 가르침을 전해주는 현대인들의 전통 지킴이다.
'명문종가 사람들'은 바로 종가를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과 삶을 담아낸 책이다. 전통 다도와 음식 전문가로 유명한 저자는 6년전부터 전국을 누비며 73곳의 종가를 직접 방문해 자료를 수집해왔다. 책은 17개월 동안 탐방한 19곳의 종가를 정리했다. 저자는 단순히 명문 종가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깃든 전통문화를 섬세한 시선으로 살펴본다. 또한 고택의 아름다운 면모와 종가의 내림음식, 차, 복식 등 생활문화도 세밀하게 보여준다. 아울러 전통 관혼상제의 예법도 상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종가가 수백년의 세월을 딛고 서게 된 원동력은 면면이 내려온 한국적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이다. '공직자의 녹봉은 곧 백성이 피땀 흘려 내는 세금이니 국가의 재정은 검소해야 한다'는 황희 정승의 청백사상을 가풍으로 삼아 검소하지만 올곧게 종가를 지키는 황씨 종손의 모습, 두 칸짜리 초가도 넉넉히 여겼던 오리 정승의 370년 전 유언에 따라 가족 납골묘를 만들고 종가를 박물관으로 꾸민 이원익 종가, 애지중지 모셔뒀던 유물 1만점을 소수박물관에 기증한 연안 김씨 만취당파 괴헌 종가는 세상 풍파와 잇속에 흔들리지 않고 전통을 꿋꿋이 지키는 선비 정신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이 책은 솟을대문을 활짝 열어젖힌 종가를 많이 소개하고 있어 전통문화 여행서로도 손색이 없다. 만석꾼 집이었던 밀양 손씨 종가에서는 전통의 7첩반상을 받을 수 있고, 솔향기 솔솔한 만산 고택에서는 풀벌레 울음소리 들으며 아련한 추억 속에 하룻밤 묵을 수 있으며, 전주 이씨 이국손 종가에 가면 붓글씨로 쓴 가훈을 받아 올 수도 있다고 일러준다. 또 세밀하게 묘사된 종가의 내림음식은 요리법까지 간단하게 정리해 놓았다.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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