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가 한창 꽃을 피우던 한 사무실. 한 후배 사원이 "무슨 영화 좋아하냐?"는 선배의 질문에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소림 축구'라고 답했다. 순간 암전(暗轉). 그리고 이어지는 폭소. 한 선배가 말했다. "참! 네 수준을 알겠다. 어떻게 소림 축구라고 할 수 있냐?" 다른 선배도 거들었다. "수준 떨어져서 함께 못 놀겠다."
주성치 주연의 '소림 축구'는 기발한 상상력과 때론 황당할 정도의 과장이 잘 버무려진 수작이다. 모르긴 해도 '문화 수준'을 거론했던 선배들도 집에서 비디오를 빌려보며 배를 꼭 부여잡고는 눈물까지 찔금거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잠깐! 독자 여러분은 무슨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지?
독자들을 일일이 붙잡고 물어볼 수 없는 탓에 대신 네티즌들의 호감도를 보기로 했다. 조사 대상은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올라온 영화 평점. 네티즌들은 영화 한 편에 대해 0점부터 10점까지 줄 수 있고, 누적된 점수의 평균 점수가 평점으로 올라온다. 한국 영화만으로 조사 대상을 한정했다.
네티즌 평점 9.0 이상을 받은 작품은 적어도 인터넷상에서는, 바꿔 말하면 전문 평론가가 아닌 일반 관람객 기준으로는 가히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평점을 주는데 있어 네티즌들은 '짠돌이'로 변신한다. 평점 9.0 이상의 한국 영화는 모두 14편. 기자가 찾아낸 작품 숫자일 뿐 실제 얼마나 많은 한국 영화가 9.0 이상의 반열에 올랐는지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14편의 면면을 살펴보자. 일단 '놀랍다'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국영화 역대 흥행순위 10위권 안에 든 작품 중 9.0 이상을 받은 작품은 단 2개에 그쳤다. 그나마 국민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9.0에 턱걸이하는데 만족했다. 한 때 신드롬까지 불러일으켰던 '친구'는 8.0에도 못미쳐 '수·우·미·양·가' 중 '미'에 그쳤다. '조폭 마누라'는 어떤가? 뭐라고 언급하기도 민망할 점수를 받고 말았다. 그렇다. 네티즌들은 단순한 재미 이상의 뭔가를 추구하고 있었다.
가칭 '네티즌 선정 명작' 반열에 오른 한국 영화들을 관찰해보면 딱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공통된 흐름이 눈에 띈다. '뒤통수를 가볍게 타격하는 감동의 물결.'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감동은 상당히 복잡미묘하다. 흔히 헐리우드 블럭버스터가 추구하는 화학반응과 같이 예정된, 뻔한 감동이 아니라 씹을수록 오묘한 맛이 우러나는 밥맛과 비슷하다고 할까.
현재 최고 평점(9.45)을 받은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도입부부터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극적 긴장감도, 그 흔한 반전도 없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면 선듯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게 만든다. '파이란'은 어떤가? 지금은 흥행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최민식이 등장한 이 영화는 개봉 당시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비디오로, 또 인터넷으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얼핏 오버하는 것 같지만 끝까지 관객이 개입할 여지를 충분히 두고 호흡하는 배우 최민식의 연기가 단연 돋보인 명작이다.
또 '지구를 지켜라'가 이처럼 호평을 받을 것으로 예상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터넷을 통한 특이한 마케팅으로 반짝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지만 흥행엔 실패했다. 엽기도 아니고 SF는 더더욱 아닌 이 영화는 오히려 너무나 뻔해서 질려버릴 것 같은 고리타분한 테마, 즉 '권선징악'을 저변에 깐다. 허탈함마저 들게 하는 반전. 영화를 보고 나와 한참 걷다보면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그러면서 길 가던 사람을 두리번 거린다. 혹시 저 사람이 외계인?
하지만 14편의 명작 중 언제라도 다시 보고픈 영화를 꼽으라면 다소 주저할 수밖에 없다. 그저 킬링 타임용으로 즐길 수 없어서다. 쉽게 말해 영화를 보는데 용이 쓰인다. '클래식'이나 '선생 김봉두', '아홉살 인생'처럼 아련한 추억을 더듬게 하는 아기자기한 감동 선사용 영화도 있지만 '박하사탕', '오아시스'류의 작품은 재감상까지 상당한 시간 간격을 요구한다.
추석 연휴, CF 마냥 반복되는 특선영화에 질린 영화팬이라면 '네티즌 선정 명작'을 강추한다. 그래서 '야! 아직 그런 영화도 못봤으면서 한국 영화를 말하냐?'고 폼을 잡아보자. 김수용기자 ks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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