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 정민 교수가 쓴 책 '미쳐야 미친다'가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다.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 한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조선시대 지식인들을 다룬 이 책은 그들의 지적·예술적 성취 뒤엔 열정과 광기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불광불급(不狂不及·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이라는 말처럼 미치지 않고선 이룰 수 없었던 그들의 열정적 생애는 요즘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그러고 보면 불광불급의 흐름은 요즘에도 면면히 이어지는 것 같다. 마니아, 폐인 등 한 분야에 '미친' 사람들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마니아가 될까. 무엇보다 사물 등의 본질을 투시하면서, 평범한 곳에서 비범한 일깨움을 이끌어내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또 미친 듯이 한 가지에 몰두하면서 일로 쌓인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다는 점도 마니아가 되는 이유일 것이다.
대구경북 CEO들을 탐구해 온 이 연재의 마지막 주제는 '마니아'. 우리 지역 CEO들이 어떤 것에 '미쳐'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기업 재무제표를 검토하는 것만큼이나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것으로 생각한다.
◆분청사기 vs 영화 '러브스토리'
1970년대 영국 런던 바클레이즈 국제은행으로 연수를 간 이화언 대구은행장. 대영박물관을 찾아 중국 당나라, 일본, 유럽의 도자기를 본 이 행장은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얼마 후 우리나라 분청사기를 보게 된 그는 자연스레 분청사기 마니아가 됐다.
"투박하지만 서민적 정서가 흐르는 분청사기를 봤을 때 대영박물관에서 본 도자기들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에 매료됐어요. 그 때부터 분청사기를 하나 둘 모으기 시작해 지금은 비록 값비싼 도자기는 없지만 비교적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를 갖고 있습니다."
여행, 지리, 역사도 이 행장의 관심 분야. "견문을 넓히고,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요즘도 여행가기 전날 밤은 초등학생시절 소풍가기 전날 밤처럼 설레는 마음에 잠을 잘 못 이룰 정도입니다."
제진훈 제일모직 대표는 영화 마니아다. 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서 생각이 막힐 때엔 휴일에 대여섯 편의 영화를 감상할 때도 있다. 영화관만큼 실감나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90mm 스크린과 스피커 8개 등 집에 소극장을 만들었다. 웬만한 영화 테이프나 CD, DVD도 소장하고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속에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러브 스토리'와 같은 사랑 영화에서는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순화를 얻을 수 있고, '간디' 같은 영화를 통해서는 지도자가 가야 할 길을 깨닫기도 합니다."
영화 제목이나 장르, 배우 이름을 외우는 식보다는 영화의 흐름, 내용, 전개되는 방식을 중요하게 본다. "내가 주인공이라면 저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다음 스토리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예견하면서 영화를 봅니다. 영화 감상을 통해 발상의 전환과 아이디어를 얻지요. 물론 스트레스도 날려버립니다."
이종원 KOG 대표도 영화 마니아. "영화를 아주 좋아하지요. 물론 게임도 좋아하지만요. 영화에 대해서는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록음악을 좋아하는데 60년대 이후 중요한 곡들과 뮤지션들은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요즘은 새로 만화에 탐닉하고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 VS 미술
백화점 안에 문화 공연장과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지역 백화점 CEO들은 예술 분야 마니아들. 이인중 화성산업(주)동아백화점 대표는 클래식 음악을 매우 즐겨 듣는다. "클래식의 독특한 맛을 그대로 살릴 수 있도록 진공관 앰프를 통해 감상하지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클래식 앨범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클래식을 내보내는 FM 음악방송을 차 안에서나 집에서 틈나는 대로 듣고, 영국의 클래식 FM TV를 인터넷을 통해 접한다. 이 같은 열성 덕분에 스쳐 들리는 클래식 음악일지라도 곡명은 무엇이며, 또 누가 작곡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됐다.
구정모 대구백화점 대표는 미술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다. 고교 3학년 때인 1971년 대구백화점 본점 6층에 대백갤러리가 개관한 것을 계기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림에 대한 저만의 독특한 감상법은 같은 장소에 대한 화가들의 시각과 해석이 작가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변화상을 분석해보는 것입니다. 내 앞에서 한 번 지나가 버리면 두 번 보기 어렵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대하지요. 그렇다고 작품 선호에 까탈스럽지는 않은 편이고, 경향이나 장르에 별 구애도 받지 않아요. " 구 대표는 출장 중에도 자투리 시간을 내 전시장을 찾는다. 작가들과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며, 형편이 어려운 작가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3C를 길러주는 골프
이상철 KEC 부사장(공장장)은 스스로를 골프 마니아라고 일컬었다. "한 가지에 집중하면 끝장을 보고 마는 성격이다보니 많은 것을 잘 하진 못하지요. 골프의 매력에 빠져 지금 싱글 수준은 됩니다. 골프는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운동이어서 제 성격과 잘 맞는 것 같아요." 목표를 찾아 도전하는 땀과 노력, 이 부사장이 골프를 좋아하는 이유다.
신수철 포스콘 대표도 골프 마니아라고 털어놨다. 핸디캡은 15이며 베스트 스코어는 74. "항상 기본에 충실하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자기 점검을 하고 발견된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끈기있게 반복 연습을 합니다. 재능이 없어선지 잘 안되기는 하지만요."
영화와 더불어 골프도 즐긴다는 제진훈 제일모직 대표는 독특한 골프론을 피력했다. "골프와 인생, 그리고 기업 경영이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린의 난해한 기복, 러프에 빠졌을 때의 암담함, 단 한 번도 똑같지 않고 늘 변화하는 상황 등이 인생이나 기업 경영과 유사한 것 같아요." 제 대표는 골프로부터 컨트롤(Control), 집중력(Concentration), 자신감(Confidence)을 배운다고 강조했다.
◆열쇠고리·사진·산
조희정 코오롱 구미사업장 부사장(공장장)은 열쇠고리 수집 마니아. 차·집·사무실·책상 열쇠 등이 달린 각양각색의 열쇠고리를 보노라면 추억이 한꺼번에 몰려 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단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풀어주는 열쇠, 구중궁궐에 숨어있는 보석함을 열어주는 열쇠를 꿰차고 있는 열쇠고리야말로 그 의미가 다양하게 느껴집니다. 고리에 손가락을 끼우고 흔들다 보면, 마음이 안정되고 주변의 이웃들이 가까워짐을 깨닫게 됩니다." 외국 풍물이 곳곳에 묻어있는 열쇠고리를 하나하나 만지면 세계일주가 부럽지 않다고 조 부사장은 귀띔했다.
한삼화 삼한C1 대표는 프로를 방불케하는 사진 작가. 신문사 주최 사진공모전에 대상을 받기도 했고, 개인 전시회, 사진 모음집 발간 등 사진작가로 열정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동우회와 지속적인 연도 맺고 있다.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아 테니스를 즐겨쳤고 1982년부터는 골프에 입문, 2년 반 만에 싱글을 기록하기도 했다. "골프의 매력 중 하나가 에티켓이지요. 심판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 스스로가 심판이 돼 골프를 치면서 정직과 예의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승일 엑슨밀라노 대표는 등산 마니아.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자연스럽게 산이나 강을 좋아하게 됐다. 요즘도 휴일이면 자연을 찾고 있다. "문경, 합천, 남한강 등 수석 산지를 찾아 산천을 구경하고 수석도 채취하고, 등산을 하고 그 지역의 맛있는 음식도 먹고…. 그러다 보면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라갑니다." 요즘은 아침 운동을 통해 다진 체력으로 직원들과 함께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 10㎞를 4차례 완주하기도 했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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