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올 추석 서민민심은…

너나없이 "살기 어렵다…核타결 희소식"

올 추석 때 고향에 모인 일가 친척들은 무슨 이야기들을 나눴을까. 삶터로 되돌아온 귀향객들이 전한 민심은 불안한 정국 상황과 가뜩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탓에 넉넉함을 바라는 명절 분위기와는 달리 우울했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 친척들이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들은 '희망'을 잃은 듯한 서민들의 삶의 넋두리로 채워졌다. 지난 설 명절과도 사뭇 달랐다. 귀향객들은 그러나 진통을 거듭하던 북핵 회담이 타결됐다는 반가운 소식처럼 앞으로는 서민들에게 희망이 될 만한 소식들이 이어지길 기원했다.

△고단한 삶의 이야기들

삼삼오오 모인 가족들 사이에서는 각 가정마다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이 큰 주제였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고향을 찾아와 잘 나가는 사업 이야기를 자랑스레 꺼 내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오히려 서로 자신이 더 어렵다며 목청을 돋우었다.

대구 달서구의 주부 김모(50)씨는 "등록금이 없어 두딸 모두 2학기 등록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나가기로 했다"며 "졸업 때까지 뒷바라지 해주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고 울먹였다.

대학 졸업 후 3년째 직장을 구하고 있는 강모(30)씨는 "집에서 용돈받아 쓰기도 미안해 추석 명절에도 학교도서관에 나와 매일 학교 식당에서 제일 싼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고 있다"며 "언제쯤 당당하게 명절에 친지들 앞에 나설 수 있을 지 걱정"이라고 했다.

정부의 실업정책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거셌다. 김우영(56·여)씨는 "대학 졸업하고 취직할 곳이 없어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면 앞으로 과연 이 나라를 누가 이끌어 갈 것인지 의문이 든다"며 "신입생 확보에만 혈안이 돼 있고, 졸업시키면 나몰라라 하는 대학과, 일자리 창출에 소극적인 정부는 청년 실업에 대한 획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지난 5월 퇴직한 뒤 새 일자리를 찾고 있는 조모(42)씨는 "친척들에겐 회사 사정상 그만두게 됐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며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체에 다니다가 갑작스레 장사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할 수도 없고, 벌써부터 내년 설 명절이 두렵다"고 고개를 저었다.

△한푼 벌기 위해 명절도 못 쉬어

추석인 지난 18일 밤 대구 중구 삼덕소방파출소 앞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 행렬이 긴 꼬리를 물고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이 곳 택시기사들의 주된 관심사는 먹고 사는 문제. 정치 이야기는 뒷전으로 밀린 지 오래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인 덕분에 평소보다 손님은 다소 많은 편이다.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다 올해 초 접고 운전대를 잡았다는 택시기사 김영석(46)씨. 집에 돈을 가져다 주기는 커녕 하루 쓸 용돈 밖에 못번다고 한숨 지었다. "회사가 가져다 주는 돈을 빼면 제 밥값이나 겨우 될 겁니다. 아내가 간병사 일을 해서 집안 살림을 겨우 꾸려나가죠. 차례만 간단하게 지내고 곧바로 일하러 나왔는데 사납금이나 채워넣을 수 있을 지 걱정입니다."

박주태(52)씨는 동료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할 때도 '누구 누구는 부동산에 투자해 한 몫 잡았다'는 말이 자주 나오지만 그것도 팔자 좋은 사람들의 사례일 뿐이라고 했다.

"우리 같은 서민이 들으면 뜬 구름 잡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투자할 여력이나 있나요. 게다가 돈만 있다고 됩니까? 직접 발로 뛰면서 정보를 모아야 하는데 하루 벌어 사는 처지에 시간 내기도 어렵죠. 그나마 오늘은 손님이라도 있으니 마음 편합니다."

대구 동성로에서 조그만 카페를 운영하는 이중훈(32)씨는 오전에 집에서 차례를 지낸 뒤 일찌감치 가게 문을 열었다. 저녁 무렵 몰려든 젊은이들로 동성로는 활기에 넘쳤다.

"명색이 대구지역 최고의 상권이라는데 가게 유지하는 것도 힘들 정돕니다. 그나마 오늘 같은 날 연휴를 즐기려는 젊은이들이 시내로 몰려나와 지갑을 열어주니 반갑죠. 자리가 없어 대기석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이 있는 것도 정말 오랜 만에 보는 반가운 풍경이네요."

△부동산이 최대 관심사

가장 큰 관심사는 먹고 사는 문제. 특히 부동산에 쏠린 관심은 서민들의 삶 곳곳에 배어 있었다. 젊은 직장인들은 월급만 받아서는 앞으로 커가는 자녀 학비도 못낼 것이라면서 직장생활의 불안감 등과 맞물려 부동산에 대한 관심을 털어 놓았다.

회사원 이규환(35)씨는 "부지런히 일만 한다고 예전 처럼 노후가 보장되지는 않는다"며 "요즘 말하는 부지런한 직장인은 회사 일은 기본이고 빚을 내서라도 재개발이나 재건축 예정지에 돈을 묻어두고, 괜찮은 경매물건이 있는 지 꼼꼼히 살피는 사람을 뜻한다"고 전했다.

김선우(45)씨는 "벌어 먹을 것은 하나도 없는데, 도심에는 온통 고층 아파트만 들어서 아파트공장으로 변해 버렸다"며 "갈수록 서민들은 집 한 채 마련하기 힘들게 됐다"고 푸념했다.

정부의 8.31 부동산 규제정책 이후 부동산 시장이 어떻게 변할 지를 두고 관심을 나타내는이들이 있는 반면 모이는 곳마다 부동산 얘기라며 개탄하는 이들도 많았다.

김재연(55)씨는 "동네마다 재개발이다, 사업승인이다, 조합결성이다 떠들다 보니 모든 관심이 부동산에 쏠린 것 같다"면서 "정부가 기왕에 칼을 뺀 만큼 서민들의 기운을 빼는 부동산 바람을 가라 앉혀야 할 것"이라 열을 올렸다. 반면 양재철(50)씨는 "곧 선거철인데 정치권은 부동산 규제를 풀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부동산 투자도 재테크인 만큼 욕할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대내외적 악재 속에서도 '다시 한번 해보자'는 작은 희망의 씨앗을 틔우는 바람들도 이어졌다. 김찬정(47)씨는 "모두가 힘들어 할 때가 오히려 더 큰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숱한 어려움속에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고 결국에는 보란듯이 어려움을 이겨낸 국민의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줄 때"라 했다. 정미경(34·여)씨는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등 정부 및 민간에서 조성되고 있는 북한과의 평화무드는 조금씩 통일의 길을 가깝게 하고 있다"며 "한민족이 한나라에서 어울어지는 또 한번의 역사적 광명을 위해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최근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한 김희선(31·여)씨는 "부동산 대책 등 정부가 투기를 막기 위해 안간 힘이지만 결국 경기침체로 파생된 문제가 아니냐"며 "앞으로 경기도 회복될 것이고 분위기를 봐가며 공인중개사업소도 개업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영업자인 이지용(30)씨는 추석을 앞두고 밀린 물품대금을 거의 받았다. 그는 이 돈에서 생활비, 명절 선물 비용을 빼고 나머지는 통장에 넣어뒀다. "요즘 모두들 어렵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위기가 곧 기회 아니겠습니까. 돈을 좀 더 모아 내년부터는 사업을 하나 더 벌여볼 생각입니다. 아직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기엔 젊은 나이니까 열심히 뛰어야죠."

최병고·최두성·권성훈·채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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