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야!…가을 동심은 즐겁다

펄럭이는 만국기 아래 개선문을 통과해 함성과 함께 등장하는 청군과 백군. 공책이라도 한 권 받기 위해 이를 악물고 힘껏 내달려 팔뚝에 푸르게 찍은 도장. 따가운 가을볕에 한달 넘게 땀흘려 연습한 부채춤과 꼭두각시놀음.

가을 운동회는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머리속에 깊이 각인돼 있다. 갓 거둬들인 각종 먹을거리가 풍성한데다 엄마 손 잡고 함께 뛰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날이었던 것.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운동회의 모습도 조금은 달라졌다. 아직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20년, 30년 전 그때 그 모습과 별로 다를 바 없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지만 준비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월이 느껴진다.

△ 변함없는 가을 행사

지난 15일 오전 10시. 대구 중구 남산초등학교에서는 높고 파란 가을 하늘 아래 가을운동회가 한창이었다. 어린이들의 응원 소리는 도심을 가를 정도로 높았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아이들은 호들갑을 떨며 자기팀이 뒤쳐지기라도 할까봐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청백계주는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가을 운동회의 하이라이트. 엄마, 아빠까지 참여해 바통을 이어받아 내달리면서 운동장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아이들이 콩주머니를 던져 박을 깨뜨리면 점심시간을 알리는 글이 휘날리는 모습도 변함이 없었다.

운동장 한편에는 할머니부터 엄마 손을 잡은 코흘리개 어린 동생까지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아직까지 가을 운동회는 온 가족이 함께 하는 나들이 날. 먼지가 풀풀 날리는 운동장 바닥에 앉은 할머니는 연신 손주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고, 엄마는 아이들의 모습을 디지털 카메라에 담는데 여념이 없었다.

추석을 앞두고 지난 주 운동회를 치른 학교는 모두 60여 개. 운동회 실시 여부와 날짜가 학교장 재량에 달려 있어 봄에 이미 운동회를 치른 학교도 꽤 되지만 아직 많은 학교들이 추석을 전후해 운동회를 개최하고 있다. 앞으로 10월 중순까지 대구 시내 곳곳에서 아이들의 가을 축제가 벌어질 전망이다.

△ 힘든 건 못 해요

하지만 운동회의 볼거리는 예전에 비해 많이 사라졌다. 매스게임이 점차 축소되거나 아예 사라지는 추세이기 때문. 여기에는 옛날과는 달라진 교육 환경이 한몫하고 있다. 연간 수업시수를 맞추기 위해 잦은 연습이 필요한 대형 매스게임보다는 부모님과 함께 하는 간단한 경기 등을 선호한다.

권기환 남산초교 교장은 "구색을 갖추기 위해 부채춤이나, 꼭두각시놀음, 소고춤 등이 끼어 있지만 수업 시간 중 교실에서 대강의 안무를 읽힐 뿐 예전처럼 운동장에서 한달 가까이 땀흘려 연습하지는 않는다"며 "만국기도 달고 차전놀이도 하고 싶지만 아이들이 힘겨워 하는데다 일을 맡아서 해 줄 남자교사가 절대 부족해 불가능"이라고 말했다.

대신 전교생과 학부모가 함께 꼬리잡기 놀이를 하거나(남산초), 아이들의 꿈을 실은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는 행사(동변초), 올림픽 성화 채화·봉송 재현(두산초) 등 간단하면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행사를 만드는데 중점을 뒀다.

지난 봄에 운동회를 실시했던 삼덕초교의 경우 학년별로 한 곡의 음악을 정해 조별로 안무를 하도록 해 수행평가를 한 뒤, 이를 운동회 날 발표하도록 했다. 홍정자 삼덕초교 교장은 "춤은 중구난방일 수밖에 없었지만 직접 고안해 만든 춤과 의상이라 아이들이 더 즐거워해 앞으로도 계속 이런 방법으로 운동회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학부모 김귀연(39.중구 남산동)씨는 "너무 볼품없는 운동회가 아닌가하는 아쉬움도 들었지만 아이들이 뙤약볕에 고생하지 않아 다행"이라며 "옛날 운동회를 떠올리면 즐거웠던 추억도 많지만 계속되는 연습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바뀌는 음식문화

가장 많이 바뀐 부분은 음식문화. 운동회 날 교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인근 치킨, 피자, 족발가게 주인들이 학부모를 맞이한다. 예전에는 엄마가 김밥과 햇밤, 땅콩 등을 정성껏 싸 들고 왔지만 지금은 맨손으로 운동회장에 와도 즉석에서 해결 가능할 정도다. 심지어 즉석에서 간이 식당을 마련해 닭을 튀겨내는 경우도 있으며, "닭튀김 한 마리를 사면 돗자리를 끼워 주겠다"며 호객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권 교장은 "지난해 상인들의 출입을 엄격해 통제해 보기도 했지만 '생계도 생각해달라'며 생떼를 써 올해는 부득이하게 개방했다"며 "아이들의 입맛이 바뀌고 편리함을 찾는 엄마들에 따라오는 것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며 씁쓸해 했다.

하지만 일부 학교에서는 운동회 날 학부모들까지 급식을 실시해 음식물 쓰레기도 줄이고, 도시락 준비하는 엄마들의 번거로움도 덜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삼덕초교의 경우 아이들이 먹는 식사를 학부모들이 한 번 체험해 보라는 의미에서 운동회에 참석한 모든 학부형들에게 급식을 제공했던 것. 식판수가 넉넉하지 않아 학부모들에게 미리 도시락통 하나와 수저를 준비하도록 부탁을 했고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흔쾌히 응해 교실에 엄마와 아이가 나란히 앉아 함께 식사를 하는 정겨운 광경이 벌어졌다.

홍 교장은 "먹을거리가 풍부한 세상에 사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운동회 날 굳이 이것저것 싸와 배불리 먹는 날이라는 개념도 조금은 바뀌어야 할 것 같다"며 "앞으로 점차 운동회 날에도 급식을 실시하는 학교가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글·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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