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나이롱 환자

20세기 섬유 혁명의 총아는 나이롱(nylon)이었다. 1935년 '듀폰' 사의 연구책임자 월리스 캐러더스가 개발한 합성섬유 나이롱이 처음 사용된 상품은 칫솔이었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대부분 돼지털로 만든 칫솔을 쓰고 있었다. 15세기 말 중국 황실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돼지털 칫솔이 450여년 만에 합성섬유 나이롱 칫솔로 대체된 것이다. 처음 칫솔 재료로 쓰일 때까지 이름을 가지지 못한 나이롱이 1938년 자기 이름을 가진 뒤 나온 여성용 나이롱 스타킹은 경이적인 신상품이었다.

◇ '거미줄보다 가볍고 강철보다 강하다'는 선전 문구와 함께 나이롱은 전 세계로 퍼져 갔다. 축복받은 신섬유 나이롱은 2차 대전 당시에는 낙하산 텐트 등 군용 섬유로 진가를 발휘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나이롱 시대는 코오롱의 뿌리 기업인 한국나이롱이 40여 년 전 대구 범어동 공장에서 원사를 생산하면서 시작됐다. 모시 삼베와 면 위주의 사회에 등장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없어서 못 팔 정도였던 나이롱 양말은 신기 편하고 질겨 나라 전역에 확산됐다.

◇ 나이롱은 그러나 언제부턴지 알 수 없지만 '사이비'를 뜻하는 말로 정착됐다. 겉만 비슷하고 실제로는 다른 것을 의미할 때면 으레 '나이롱'이 접두어로 붙여졌다. 나이롱 군대, 나이롱 환자, 나이롱 학생, 나이롱 신자 등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표현할 때 주로 썼다. 진짜 같지만 실제 가짜라는 말이 됐다.

◇ 그 나이롱 환자가 된서리를 맞게 됐다. 경미한 접촉 사고로 장기간 입원한 뒤 거액의 보험금을 신청한 환자에게는 보험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후진 주차 과정에서 가벼운 접촉 사고를 당한 뒤 목 디스크와 뇌진탕 증세를 주장하며 2년 가까이 입원과 통원치료를 반복하며 가해자의 보험사에 5천여만 원의 보험금을 신청한 피해자를 법원이 나이롱 환자라고 단정한 것이다.

◇ 무늬만 환자복을 입고 있을 뿐 실제로는 아픈 데가 없는 나이롱 환자는 교통사고 환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병원 주변에선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대부분 모른 채 눈감고 만다. 나이롱 환자가 주는 피해는 가해자나 해당 보험사만이 아니라 전체 보험 가입자에게 돌아간다. 나이롱 환자뿐이 아니다. 사회 곳곳에 '나이롱'이 판치고 있다. '나이롱'과 진짜를 구별할 줄 아는 사회의 안목이 아쉽다.

서영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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