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비슬산 억새

산능성 하얀 파도에 '가을병' 씻어내고…

억새밭에 서면 외롭지 않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게 나 혼자 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송보송한 솜털 같은 부드러움으로 산 능선을 뒤덮고 있는 억새밭. 이 능선에선 하얀 파도가 인다. 파스스 파스스. 그 파도를 따라오는 가을소리. 그 가을바람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게 억새밭의 매력 아닐까. 단풍의 화려함에는 비할 수 없어도 은근한 매력은 뒤지지 않는다. 단풍에 비해 일찍 시작하고 늦게까지 볼 수 있다는 점도 억새만의 장점.

억새로 알려진 명산은 많지 않다. 대구근교라면 경남 밀양의 사자평, 창녕의 화왕산 정도. 반면 대구 달성의 비슬산은 이들 억새명산에 비해 규모는 작아도 만만치 않은 풍경을 보여준다. 정상 부근 산봉우리를 뒤덮은 억새는 한 곳에 몰려 피었다. 사실 억새만 따진다면 다른 억새명산에 비해 초라하다. 하지만 해넘이와 어우러지면 사자평의 드넓은 억새평원에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해질녘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억새능선 아래로 넓은 현풍들판과 낙동강이 어우러져 아늑하고 포근하다. 억새가 많지 않은 '억새명산'인 셈. 억새산행이지만 삐쭉 솟은 바위 등 뜻밖의 풍경을 보는 것도 즐거움을 더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도 비슬산 억새밭의 특징이다. 점심나절 특징없이 바람따라 움직이던 억새밭은 저녁나절이면 급변한다. 해질녘 햇살을 품고 가을바람에 춤추는 억새는 황홀하다. 화려하지 않으면 아름답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억새밭을 헤집고 반짝이는 햇살 때문일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다 보면 눈끝까지 찡해온다. 괜히 계절병이 도질 법하다. 목청껏 노래를 부른다고, 비틀거릴 만큼 술에 절어본다고 해서 계절병을 막으랴. 자칫하면 덧나기 일쑤. 하지만 이 가을, 억새밭에 서보라. 가슴 알싸한 쓸쓸함은 사라진다. 흑백사진 같은 은근한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터. 어쩌면 억새밭에서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나서야 속이 후련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마음 맞는 사람과 억새밭을 거닐 마음의 준비가 됐다면 가을 산으로 갈 일이다. 지금 비슬산에는 억새가 하얗게 피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쯤이면 움츠렸던 억새가 하나 둘 고개를 들고 하얀 꽃을 피우는 황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비슬산은 바위가 주인이다. 여타 산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바위들이 지천이다. 바위들의 전시장인 셈. 산등성이를 따라 정상 부근까지 이어지는 바위군들을 보노라면 산행의 어려움까지 잊을 만하다. 이 바위들의 중심지대가 대견사지.

억새산행을 겸해 대견사지 부근을 감싸고 있는 바위들을 보기 위해 비슬산을 오른다. 휴양림에서 지정해 놓은 관찰소 3곳이 비슬산 바위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다. 제1관찰소는 출발지인 비슬산자연휴양림 안의 암괴류(巖塊流·Block stream).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휴양림 끝머리 청소년수련장 앞에 있다.

암괴류는 휴양림 계곡에서 시작돼 거의 정상부근인 대견사지 밑까지 이어진다. 농짝만한 바위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1만~8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 무렵 당시 흘러내리다 멈춘 암괴류의 길이는 2㎞가 넘는다.

본격적인 산행은 휴양림 관리사무소에서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1㎞쯤 오르면 나타나는 '비슬산쉼터'에서 시작한다. 이곳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오른쪽 포장도로는 약 2㎞의 임도로 조화봉 서쪽 능선 아래까지 이어진다. 등산로는 왼쪽길. 가파르긴 하지만 부담은 없다. 비슬산의 높이가 1,084m이고 휴양림의 높이는 600m. 400m의 표고차를 오르는데는 약 1시간가량 걸린다.

대견사지 한쪽 끝 바위 위에서 하늘을 향해 선 삼층석탑이 보일 쯤이면 정상 부근의 임도에 닿는다. 오른쪽은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임도이고 대견사지는 왼쪽 방향. 위쪽 주능선으로 향하면 대견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으로 이어진다. 제2관찰소는 휴양림으로 향하는 임도를 따라 200여m를 가면 안내판이 나타난다. 이곳서 능선을 향해 5분 정도 오르면 애추(崖錐·Talus)지역이다. 부채꼴 모양으로 쌓인 바위들이 이색적이다. 층층이 쌓인 바위들이 비스듬히 능선에 꽂혀 빳빳하게 고개를 곧추세운 자세다. 누가 일부러 쌓아두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잘 짜맞춘 퍼즐처럼 묘하게 한 덩어리로 엉켜 있다. 칼바위라고 부르는 이 바위군은 국내에서 애추의 형성과정을 가장 잘 나타내준단다. 자연관찰학습장으로서도 빠지지 않는 여행지인 셈이다.

이 바위군은 대견사지까지 이어진다. 이곳서 대견사지까지는 10여 분. 느릿느릿 바위들을 감상하며 걷기에 좋다. 대견사지는 토르(Tor·탑바위)라는 바위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정상 부근 안쪽의 평원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제3관찰소다. 부처바위, 코끼리바위, 곰바위 등 기묘한 바위들이 볼거리. 하지만 장쾌하고 광활한 조망만큼은 어디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 3층석탑이 서있는 서쪽으로 햇살에 반짝이는 낙동강이 유난히 아름답다. 그 주변으로 거칠 것 없는 현풍 앞들이 쫙 펼쳐진다. 절터 깎아지른 바위 위 한쪽 끝에 우뚝 선 3층석탑이 외롭다. 하늘 끝에 선 듯 위태한 모습으로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있다.

기기묘묘한 바위도 그렇고 탑을 배경으로 펼쳐진 풍경도 그렇고 이곳에선 누구나 탄성을 내지르게 된다. 하지만 섣부른 탄성은 잠시 접어야 한다. 이 탄성은 대견사지를 넘어 비슬산 정상으로 향하면서 환희로 바뀌기 때문이다.

대견사터를 에워싼 바위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르면 좌우로 탁 트이는 시야가 시원스럽다. 눈앞으로 가야할 비슬산의 정상이 규모를 알 수 없는 바위 위에 우뚝하고 시야를 아래로 떨구면 참꽃군락지가 넘실거린다. 참꽃군락지를 끼고 능선을 따라가는 이 등산로는 완만하다. 품이 넉넉하고 확 트인 전망에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대견사지 위쪽 능선에서 비슬산 정상까지는 4㎞. 1시간 30분 거리다.

◇비슬산 암괴류와 억새산행 코스=비슬산자연휴양림-(1시간40분)-대견사지-(1시간30분)-비슬산 정상-(50분)-도성암-(40분)-유가사 주차장.

글·박운석기자 dolbbi@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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