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폴 오스터가 쓴 소설 '공중곡예사'에 이솝이라는 소년이 등장한다. 곱사등이이며 흑인인 이솝은 미국 중부 캔자스 주의 한적한 시골에서 홀로 무수한 책들을 섭렵했다. 이윽고 스무 살이 되자 이솝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부의 도시들을 여행한다. 동부의 명문대학 교수들은 그를 면접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엄청난 실력 때문이었다. 모든 대학이 그의 입학을 환영하며 4년간의 장학금을 약속한다. 그러나 이솝에게는 명문대학보다 할렘의 사창가에서 더 생생한 도시체험을 한다. 이솝이 대학에서 받은 충격보다 대학이 시골의 곱사등이에게서 받은 충격이 더 컸다는 것이다.
지역문화를 살리자는 취지의 글을 쓰려고 하는데 왜 만화에나 나옴직한 이솝의 이야기가 먼저 떠오를까.
21세기는, 단언하면 문화의 시대이다. 정치든 경제든 어떤 생산물에도 문화적 아이콘이 덧붙지 않으면 행세하기가 어려워졌으니 문화의 비중을 실감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었고 각 지자체들은 다투어 문화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문화전문가라 하더라도 지자체가 마련한 문화상품, 혹은 문화축제의 이름을 다 외우기는 힘들 것이다. 대도시는 물론이고 소읍까지도 문화행사의 피켓을 높이 추켜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에는 '문화'가 없다고들 한다. 문화는 서울에 다 몰려 있고 지역은 텅 비었다고 하니, 이상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지역문화의 속을 들여다 보면 문화의 서울 예속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된다. 지자체의 문화행사 기획에서부터 지역 문화단체들의 지원에 이르기까지 상당부분 중앙인사들의 손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를 문화예술 전체로 확대해서 들여다 보면 문화예술의 서울 종속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말하기 민망할 지경이다.
어떤 이는 원래 '문화'란 지역에 있었던 것인데 서울이 다 빼앗아 간 것이라고 강변한다. 신라의 말탄사람 토기나 백제의 금관 같은 것을 구경하려면 지역 소재 박물관 아니라 서울의 중앙박물관으로 가야 하는데 사실 지역문화 유산을 수탈해 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거친 표현이긴 하지만 말의 의미는 엿볼 수 있다.
지역문화의 광범위한 예속현상은 지역 행정부와 문화인들에게도 책임이 크다. 문화행사에 문화전문가보다 공연기획자에게(그것도 서울에서 내려온) 더 중심역할을 맡긴다든가, 관람객의 수로 문화행사의 성공여부를 평가한다든가, 창의적 문화생산은커녕 지역홍보를 위한 이벤트로 전락시키는 점, 지역 문화인들에 대한 홀대와 대학의 관련학과 출신들을 활용하지 못하는 점, 그리고 '문화민주화'에 대한 지나친 강박관념도 문화예속의 한 원인이 된다. 문화예술인들의 빈약한 창작성취도 빠트릴 수 없다.
지역의 문화예술을 살리자는 말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구호가 무성한들 문화예술이 살아날 리도 없다. 권력과 소비라는 관계망에 얽혀 있는 '문화의 지방분권화'는 더 요원할지 모른다. 중앙정부도 고사 직전이라 판단하고 수차례 공청회를 열어서 만든 '지역문화진흥법'을 이번 가을 정기국회에 상정할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있었던 많은 논의와 제도가 허위로 끝나고 만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문화적 자부심의 결여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앞의 얘기처럼 서울이 지역의 문화유산을 수탈했다고 보는 배타적인 태도야 지나칠 테지만, 우선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는 지역의 산물이라는 자부심은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자부심이 지역문화 활성화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자부심을 잃은 지역문화 논의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거기에는 문화권력에 대한 욕망과 문화분권에 대한 정당성만 피력될 텐데, 그런 따위로 문화예술의 생산적인 단초가 형성될 리 없는 것이다.
지역문화를 생각해 보는 자리에 느닷없이 만화 같은 이솝의 이야기가 떠올랐던 것은 그 때문이다. 궁벽한 시골에 살았으나, 도시가 그를 보고 경악했다는 이솝의 이야기를 문화예술에서도 보고 싶은 것이다.
엄창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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