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소현 세자의 비극적 죽음은 '만일 죽지 않고 왕위를 이었더라면'이라는 가정을 하게 한다. 그랬더라면 우리 역사가 다른 길로 갔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 때문이다.
대명 사대주의 기치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한 후 병자호란의 삼전도 치욕을 겪은 아버지 인조의 반청 감정은 청나라의 선진을 인정하고 배워야 한다는 아들 소현 세자의 현실 인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버지와 그를 따르는 당시 지배층에 의해 독살됐다는 게 소현 세자 죽음에 관한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독살설은 현실 인정보다는 명분이 우위에 있던 당시의 현주소를 알게 한다. 소현 세자의 죽음은 조선을 지루하고 처절한 명분의 싸움터로 몰아 갔다. 국민 감정에는 맞아 떨어졌겠지만 효종의 북벌 주장은 과연 얼마만큼의 현실성이 있었을까.
형 대신 왕위를 이은 효종의 정당성을 강조한 북벌의 명분은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북벌의 주인공 효종의 죽음 이후 벌어진 예송 논쟁은 명분 사회 조선의 선비를 서로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싸움터에 내던졌다. 명분에 희생된 소현 세자의 비극이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다투는 명분 싸움으로 이어져 훗날 망국의 씨앗이 됐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래서 '소현 세자가 죽지 않고 왕위를 이었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명분과 현실이 얼마만큼 조화를 이루고 있을까. 불행하게도 현주소는 수백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나만이 옳다는 명분 싸움이 치열하다. 북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의 시각 차이는 나라 전체를 때 아닌 냉전 시대로 후퇴시키고 있다. '빨갱이'란 말이 유령처럼 살아나 저잣거리를 활개 치고 다닌다.
사학 재단을 비리의 온상으로 몰아세우는 이와, 법이 개정되면 학교 문을 닫겠다는 재단의 다툼이 이어지고, 수십 년간 한국 전쟁의 영웅으로 인정받던 맥아더 장군이 전쟁광으로 전락할 처지에 놓였다. 나라 안 보'혁'좌'우 진영이 돌멩이를 던지고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미국이 동상을 넘겨 달라고 한다는 소식이 코미디처럼 전해진다.
그런데도 이른바 지도층은 태연하다. 나라 전체를 휘감는 이념 갈등을 줄이려는 노력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흥분을 고조시키는 응원단장으로 나서려고 한다. 먹고 살기 바쁜 서민들은 관심도 없는 일을 나라의 이슈로 만든다.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그 자신 스스로 막시스트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쟁 체제의 장점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새 방침에 대한 국민과 당원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 사회주의자임을 강조하면서도 자본주의 시장경제 노선을 택함으로써 영국을 다시 강대국 대열에 서게 했다.
명분에 휩싸인 사회는 경직된다. 나의 노선이 옳다며 옆길로 나서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과거의 독재가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초등학생까지 누구나 들고 나는 인터넷 마당에서 펼쳐지는 원색적인 명분 대결은 내일의 한국 사회에 대한 기대를 우울하게 한다.
이런 판에 내달 치러질 재'보선과 관련한 강재섭 한나라당 원내총무의 제안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여야 정치권이 말로만 지역 구도 타파를 외치는 대신 서로의 텃밭을 나눠 갖자는 제안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물론 "한나라당이 대구'경북 당이냐"며 TK의 잠재력에 딴지를 걸고 정당의 존재 의미를 강조하는 여타 의원들이 동의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한나라당이 대구에서 한 석을 내어 주고, 호남도 한나라당에 한 석을 양보한다면 이야말로 진정한 영호남 갈등 해소의 시발점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바꾸면 내일이 달라진다고 한다. 역사의 발전 뒤에는 언제나 상식을 뛰어넘는 몽상가가 존재한다. 명분에 얽매여 오늘을 이어가는 이에게서는 내일의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긴 어렵다.
徐泳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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