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페인트 건 스포츠'

화창한 가을을 무대로 뭔가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문득 주말팀의 한 선배가 말문을 연다. "어이, 전 기자. 서바이벌 한번 해보는 건 어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쥐죽은 듯한 목소리로)네."

회의가 끝나자마자 인터넷을 뒤졌다. 어렵사리 지난 7월 개장했다는 팔공아이파크를 찾았다. 도심에서 자동차로 1시간가량이라 조금 멀기는 하지만 팔공산 자락에 걸쳐 있어 자연 속으로 여행을 떠나온 듯 신선한 산내음에 기분이 절로 상쾌해진다.

도착하자마자 제각각 착용 장비들을 챙기느라 바쁘다. 다들 게임을 즐기려고 왔을 터인데도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프로덱터와 무릎보호대, 장갑, 헬멧 등을 착용하니 꽤나 그럴싸한 맵시가 난다. 이날 게임은 각 팀에 여자 한 명씩이 끼여 5대 5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상하다. 여자들은 앞뒤 모두 프로덱터를 하는데 남자들은 앞쪽 프로덱터만 한다. 남녀 차별 아니냐고 비아냥을 떨자 조교를 맡은 김태오(24) 팔공아이파크 총괄팀장이 반문한다. "전투에서 뒤를 보이는 군사는 어떻게 됩니까." 곧바로 고개를 떨구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김 팀장의 교육이 시작됐다. "보통 서바이벌로 알고 있는 이 게임의 정식 명칭은 '페인트건 스포츠'입니다." 아무리 김 팀장이 열변을 토해도 호응이 별로다. 그러자 김 팀장은 이런 분위기에도 익숙한 듯 군대식으로 분위기를 잡는다. "목소리가 작습니다. 알겠습니까." 삽시간에 모두들 긴장한다.

15분 동안의 교육이 끝나고 드디어 서바이벌장으로 향한다. 펜스로 둘러싸인 서바이벌장은 마치 소형 훈련장 같다. 공간은 좀 작아보이지만 군데군데 은폐물이 설치되어 있어 게임을 즐기기엔 부족함이 없다.

첫 게임은 상대팀을 모두 죽여야 끝나는 전멸전. 헤드샷(머리를 맞추는 것)으로 승부를 가리기로 했다. 우리 팀의 명칭은 거창하다. '이글.' 반면 상대팀은 용팔이란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김 팀장의 출발 구령과 함께 게임에 돌입했다. 모두 겁을 먹어서인지 좀체 나서질 않는다. 탕탕탕! 정신없이 날아가는 페인트 볼을 용케 피해 뛰쳐나가 은폐물에 숨었다. 하지만 당나라 군대가 따로 없다. 어느새 세명이 한 은폐물에 붙어 우왕좌왕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헬멧에 뭔가 스쳤다. 전사한 건가 가물가물했지만 조교가 아무 말이 없어 계속 게임에 열중했다. 하지만 어디서 날아온 건지 또다시 페인트 볼 하나가 헬멧에 정통으로 맞으면서 터졌다. 이젠 숨기지도 못하는 상황. 페인트총을 어깨 위로 높이 쳐들고 '전사(戰死)'라고 외쳤다. 몇 분이 지났을까. 우리 팀은 결국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해야 했다.

두 번째 게임은 깃발쟁탈전. 적진의 깃발을 먼저 뽑는 팀이 이기는 게임. 모두들 첫 경기는 작전 실패라며 색다른 작전을 세운다. 시작과 함께 무조건 각자 맡은 방향으로 돌진한다는 것. 호령과 함께 기자가 맡은 오른쪽 방향으로 앞뒤 보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은폐물에 몸을 숨긴 뒤 첫 경기와는 달리 마구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요리조리 피하는 상대팀원을 맞추기란 쉽지 않다. 처음엔 한 방향에서 날아오던 페인트 볼이 어느새 사방에서 날아든다. 한없이 쏟아지는 페인트 볼에 옴짝달싹 못한다. 고개를 푹 숙였지만 사방에서 날아오는 페인트 볼을 모면할 순 없었다. 페인트 볼이 기자의 허벅지와 팔에 부딪쳐 터진다. "아얏." 신음 소리가 자동으로 나올 만큼 온 몸이 따끔하다. 지켜보던 조교가 안쓰러운지 종료를 선언한다.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해 있자 우리 팀이 이미 전멸되었다고 일러준다. 허탈함을 감출 수 없다. '이름만 이글이면 뭐해. 맥도 못 추는데.' 결과는 또다시 완벽한 패배다.

게임을 마무리지으며 모두들 이마에 흥건히 고인 땀을 닦기에 바쁘면서도 얼굴엔 흐뭇한 웃음이 가시질 않는다. 갑자기 권고운(23·여·남구 봉덕동)씨가 귀띔한다. 첫 경기에서 기자 헬멧을 맞춘 장본인은 자신이라고. 갑자기 기자의 얼굴이 붉어진다. 권씨는 "여자들이 오히려 서바이벌 더 잘해요. 여자들 얕보면 안 돼요"라며 어깨를 으쓱한다. 054)382-1007(팔공아이파크).

글·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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