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가을, 스크린에는 '멜로의 계절'답게 빛깔 다른 특별한 사랑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30세 여성이 첫사랑과 닮은 17세 소년과 사랑에 빠지는가 하면 시골 노총각과 에이즈 환자인 화류계 여자와의 사랑은 파격적이지만 절절하고 애틋하다. 삭막한 현실적 사랑에 지친 사람이라면 스크린 속의 멜로 속으로 빠져볼 만하다.
◆ 사랑니
어느 날 서른 살의 당신이 17세 첫사랑과 무척이나 닮은, 그것도 이름까지 같은 소년을 만난다면, 그리고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면?
여기, 서른의 조인영(김정은) 앞에 첫사랑과 외모는 물론 이름까지 같은 17세 이석(이태성)이 나타난다. 잘나가는 대입학원 수학강사 조인영은 러닝머신을 뛰고 비타민을 챙겨 먹고 목에 에센스를 정성스럽게 펴바르는 평범한 서른살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런 인영 앞에 첫사랑과 외모는 물론 이름까지 같은 수강생 이석이 나타난다.
인영은 이석에게 미묘한 이끌림을 느끼게 되고 그런 자신의 감정을 거부하지 않고 그 이끌림대로 솔직하게 표현한다. 비오는 날 이석을 찾아가기도 하고 이석을 이끌고 여관에 드나들기도 한다. 함께 음악을 듣고 패스트푸드점에서 다퉈가며 사랑을 가꿔오던 이 커플 앞에 이석을 좋아하는 17세의 또 다른 조인영이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영화는 독특한 시간설정 위에 놓여있다. 주인공의 과거 이야기가 현재와 겹친다. 17세 조인영은 서른 살 조인영의 과거인 동시에 서른 살 조인영을 만나러 온 또 다른 조인영이기도 하다. 17세의 조인영과 이석의 이야기를 따라가던 관객들은 영화 중반에 이르러 어리둥절해진다. 이 모호하게 얽혀있는 시간적 흐름은 첫사랑의 형태와 비슷하다. 첫사랑은 분명 과거이지만 동시에 평생의 연애관에 영향을 미치는 현재형이기도 하다. 감독은 첫사랑 남자 이석과 모든 것이 똑같다는 이유로 17세 이석에게 빠져버린 조인영의 사랑을 과거와 현재가 겹치고 분리되는 방식으로 전달한다.
주인공 조인영 역을 맡은 김정은의 연기 변화도 볼 만하다. 기존 캐릭터와 다르게 수다스럽지 않고 오히려 대사를 극도로 절제하고 섬세한 손짓, 표정이나 주변 상황으로 이야기를 엮어간다.
이 때문에 다소 파격적인 주제인 '17세 학생과 서른 살 학원 선생의 사랑'은 잔잔한 화면 속에 묻힌다. 가끔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는 이야기 진행이 껄끄럽고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 나타나긴 하지만 이에 대해 정지우 감독은 "주관적 심리상황을 따라가는 영화"라고 설명한다. 대사와 이야기 흐름보다는 등장인물의 미묘한 심리 흐름과 연기 리듬에 중점을 두고 보기 적절한 영화다.
◆ 너는 내 운명
순박한 농촌 노총각과 다방 아가씨의 사랑이야기. 어쩌면 21세기에 걸맞지 않게 촌스럽고 구태의연한 사랑이야기가 21세기 연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영화가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과 연기자들의 탄탄한 연기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
서른 여섯의 노총각 석중(황정민)은 오로지 목장일과 어머니밖에 모르는 성실한 농촌 총각이다. 어머니의 성화로 맞선을 보기 위해 필리핀까지 다녀왔지만 아직도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진 순박한 사람. 그가 스쿠터를 타고 가다가 스쳐 지나간 은하(전도연)에게 첫눈에 반한다. 은하는 낮에는 티켓다방에서, 밤에는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화류계 여자. 석중은 아침마다 갓 짜낸 우유와 장미 한 송이로 마음을 전하기도 하고 '편히 쉬라고' 티켓을 끊기도 한다. 석중의 한결같은 순정에 은하도 어느새 마음을 열게 되면서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한다.
여기까지라면 그저 평범한 단막극 한편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영화의 본격적인 진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갑자기 찾아온 은하의 옛 남자친구로 인해 은하와 석중의 행복한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 은하를 지키기 위해 석중은 전 재산을 팔아 은하의 옛 남자친구에게 주고, 이를 안 은하는 석중의 곁을 떠나기로 한다. 설상가상으로 은하가 에이즈에 걸렸음이 밝혀지는데, 은하는 이를 알지 못하고 떠난다. 석중은 은하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지만 결국 은하는 '복수심에 불타 수천 명의 남자들과 관계를 가진 에이즈 윤락녀'가 돼 구속된다.
박진표 감독의 전작 '죽어도 좋아'처럼 이 영화는 소외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일흔 살 노인들의 사랑 이야기나 에이즈에 걸린 여성과 농촌 총각의 사랑은 다소 예외이지만 이 역시 삶의 진실 가운데 한 단면이다.
은하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석중의 마을은 온통 에이즈 검사로 들끓는다. 석중을 대하는 마을사람들의 태도도 예전과 달라졌다. 식당에선 석중을 거부하고 같이 술 한잔할 사람도 없다. 이는 에이즈라는 질병을 대하는 편견의 시각을 다루고 있어, 이 영화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제목처럼 통속적인 멜로 영화지만 감정을 포장하거나 눈물을 쥐어짜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멜로'임이 틀림없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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