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지하의 사상기행-(4)'모심'과 '살림'

이번에는 이른바 '모심과 살림'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자.

전통적인 생명론에 대해 20여 년 넘게 공부하는 과정에서 내가 도달한 결론은 한국의 생태 담론·생명론의 핵심은 '모심'이라는 것이다. 모심이 충족돼야 살림이 가능하고, 살림이 충족돼야 아름다움이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모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생명론, 환경운동, 생태학적인 모든 모색은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 또는 미적 충족감에 도달해야 결론을 맺을 수 있다. 즉, 생명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미적 판단에 도달해야, 생명이 아름답다는 것에 도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을 딛고서야 비로소 각 부분, 교육·문화·언론·과학에 있어서 함부로 생명 복제니 유전 공학이니 하는 얘기가 안 나오고, 환경문제도 온전하게 풀릴 길이 생길 것이다.

한국은 아시아의 오래된 전승들을 원형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인류의 시원으로서의 아시아의 고대, 아시아의 상고·원시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민족의식은 세계적이다. 그래서 한국의 전승을 얘기하는 것은 곧 세계적 전승의 중요한 부분을 얘기하는 것이 된다.

우선, 우리 민족의 사유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 ', ' ', ' ', ' ' 네 가지를 살펴보자. ' '은 광명, 빛, 햇빛, 태양을 말하고, ' '은 어둠, 물, 구멍, 여성성, 어둑어둑한 것으로 노자가 동굴이나 현빈(玄牝)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 '은 아시다시피 우주, 큰 것, 낱 개, 한 개, 중앙을 의미한다. 우주를 말한다.

그리고 ' '은 햇살, 솔개, 새, 생명을 뜻한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네 가지 말은 모두가 생명과 연관된다. 바로 생명의 원초적인 것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전통사상, 동아시아 고대의 전승은 생명과 깊이 뿌리를 대고 있다.

두 번째, 우리 민족은 북두칠성을 보고 경배하고, 북두칠성을 통해서 우주에 대한 인식을 키워왔고, 특히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관계를 통해서 종교적 심성을 발전시켜 왔다.

스티븐 호킹도 지구 생명의 기원을 북극에 두고 있다. 북극은 물을 의미한다. 우리 민족의 전승들은 모두 북극, 북극성에서 생명의 기원을 찾고 있다. 한민족, 또는 동아시아나 중앙아시아의 고대 생명론, 고대 생태담론의 기원은 바로 북극에 있는 것이다. 지구의 생성도 북극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이것은 설화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세 번째는 아주 쉬운 얘기지만, 우리 할머니들은 정화수 떠놓고 삼신(三神)할머니한테 생명의 탄생을 빌었다. 좋은 아들 점지해달라고. 삼신은 생명과 바로 직결되는 신앙 대상이었는데, 이것은 천(天)·지(地)·인(人)·삼재(三才)·삼극(三極)사상의 기원이기도 하다.

1만 4천년 전인가 2만년전 직녀성, 태양계 중심의 남두성, 은하계 중심의 북두칠성 등 삼신이 지구 중력권에 가장 가까워졌을 때 우주의 상태가 가장 평화로웠다는 설화도 있다. 그런 점에서 삼신은 생명론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산해경(山海經)에는 예맥·숙신 등 동이족, 한민족을 '호생불살생군자지국(好生不殺生君子之國)'이라고 표현한다. 호생은 산 것을 좋아한다, 살리기를 좋아한다, 생명을 사랑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불살생은 산 것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족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엄밀히 따져서, 민족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실제로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민족적 근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자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나. 이것은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는 동시에 생명 또는 산 것을 좋아하고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 근본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알다시피 우리 민족의 종교, 시원의 종교는 풍류도(風流道)이다. 풍류도에 대해 고운 최치원 선생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 이름이 풍류다. 그것은 애당초부터 유(儒)·불(佛)·선(仙) 3교를 아울러 포함하고 있고, 인간뿐 아니라 뭇 동식물과 무기물까지 포함하여 산 것, 존재하는 것 일체를 사랑하고 가까이 사귀어서 감화, 변화, 진화시킨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包含三敎 接化群生)"고 설명했다.

인간만이 아니라 뭇 동식물, 산 것들, 그리고 살았다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실제 산 것과 다름없는 무기물들, 돌, 흙, 물, 바람, 티끌마저도 다 산 것으로 인정해서 접하고, 사귀어서 감화시키고 진화시키고,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접화군생(接化群生), 네 글자 안에 현대생태학, 생명론의 핵심이 들어있는 것이다.

생명의 가장 큰 특성은 세 가지 또는 네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영성, 관계성, 순환성, 다양성네 가지다. 어떤 사람은 생명의 영성을 다양성 안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성에만 영성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관계성, 순환성에도 다 영성이 작용한다. 그러나 영성만 따로 떼어서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세 가지가 되든가 네 가지가 되는 것이다. 접(接)은 관계성, 화(化)는 순환성, 군(群)은 다양성, 생(生)은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생명의 중요한 특성들을 접화군생 네 글자가 다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생태학 뿐만 아니라 탈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 철학 쪽에서도 중요하게 제시되는 문화의 내용에 있어서 미적이면서 동시에 윤리적인 패러다임을 모색하려 할 때, 접화군생처럼 정확하게 대응하는 말은 드둘다.

변화한다는 화(化)를 진화로 생각하면 생태윤리적 패러다임이 되고, 감화라고 할 때는 미적인 패러다임이 된다.

예를 들어 오래 전에 나온 '나의 청춘 마리안느'라는 영화를 보면, 뱅상이라는 주인공이 기타를 치니까 기숙사 안에 있던 친구들뿐만 아니라 사슴들, 토끼, 다람쥐들이 감동하여 함께 창밖에 몰려드는 아름다운 장면이 나온다. 물이나 풀, 흙, 돌까지 감동을 했다는 것은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상상력을 동원해 유추한다면 그것까지 가능하지 않겠나 싶다. 이게 접화군생이 아닐까.

예술의 최고 목표는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감동시켜서 그의 행동이라든가 인생을 변화시키는데 있다. 그런데 진짜 예술의 대가들은 비밀일기라든지 여러 가지 흔적 없는 기록들을 통해서 또는 대화를 통해서 사물까지 감동시키는 것이 예술의 최고목표라고 말해왔다. 그것은 동서양이 같다. 동식물뿐만이 아니라 무기물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을 때 예술은 비로소 종교의 높이까지 올라간다. 이것이 최고목표다. 그렇다면 접화군생의 풍류도가 어째서 화랑들의 수련지침이었는지, 그리고 많은 선인(仙人)들의 수련 목표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오늘 우리가 한국 생명론의 맨 마지막 결론을 왜 미적 판단, 미적 체험에 두는지, 풍류가 왜 종교이면서 동시에 예술인지, 또 생태 환경운동의 현재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문화운동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생태적 감각으로 바꿔야 해결될 수 있는지, 그리고 감시 고발만 일삼는 환경운동이 어째서 미래의 전망이 없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제일 아름다운 장면은 하느님이 창조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창조를 끝내고 나서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라는 구절속의 "참 좋다"라고 했던 부분이다. 그것처럼 멋진 것은 없다. 아름답다는 것이다. 완성의 의미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에서 프랑스 혁명을 실패작으로 규정한다.아주 냉정하게, 도덕과 자연충동, 즉 정치나 경제적 충동, 또는 그 방향에서만 혁명을 다그쳤기 때문에 그렇게 혼란이 왔다는 것이다. 5월 학살, 루이16세 처형, 그 뒤로도 혁명이념의 전파라는 슬로건 아래 나폴레옹은 전 세계를 짓밟고 다녔다. 이것에 대해 실러는, 만약에 제3의 충동인 미의 충동 또는 종교적 충동인 유희충동에 기초를 두고 혁명을 진행했더라면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즉, 미적 교양과 미적 교육을 통해서 완성된, 평형 잡힌 인간, 즉 옛날 종교적인 인간에 대해서 요구했던 그런 근본적이고 아름다운 인간, 온전한 인간에 대한 교육을 대중화시켜서 그런 인간들이 세계를 변혁시키는 운동을 했더라면 그것과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다.

수백 년이 지났지만 오늘날에도 다시 문제가 되는 내용이다. 미적 교육과 상상력, 미적 판단의 온전함, 이것들을 통해서 성스러움에, 거룩함에 도달했을 때-이것이 최고의 미인 숭고미이다- 세계가 제 모습을 찾지 않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찾는 미적이면서도 윤리적인 패러다임의 핵심내용이 아닐까. 하느님이 자기가 만든 예술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했듯이 우리가 변혁시킨, 치유한 세계를 두고 아름답다 하고, 우리가 치유해야 할 세계의 미래상을 아름답다고 보고, 거기에 근접한 것을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그런 미적 의식을 가질 때, 우리 소인들, 쌍놈들도 비로소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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