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처서 지나고 땅에서 서늘한 기운이 돌게 되면 고목나무 줄기나 바위의 검붉은 살갗 같은 데에 하늘하늘 허물을 벗어놓고 매미는 어디론가 가 버린다.

가을이 되어 수세미가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 그런 수세미의 허리에 잠자리가 한 마리 붙어 있다. 가서 기척을 해 봐도 대꾸가 없다. 멀거니 눈을 뜬 채로다. 날개 한 짝이 사그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내 손이 그의 몸에 닿자 진 꼬리의 중간쯤이 소리도 없이 무너져 내린다.

김춘수(1922~) '순명(順命)'

이 시는 대지에 가을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늦여름 오후의 저녁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무대는 시인의 앞마당 정원으로 여겨집니다. 심은 지 오래되는 나무들도 보이고, 정원석도 등장하고 있군요. 현관 앞에는 수세미를 심어서 덩굴을 올린 듯합니다. 시인은 방금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젓하게 마당을 거닐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매미의 허물과 잠자리에 눈길이 머뭅니다. 허물을 벗어놓고 떠난 매미! 수세미에 붙은 채 죽은 잠자리! 이것은 가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떠난 여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계절이 바뀌는 우주의 섭리를 매미와 잠자리는 조용히 받아들였습니다. 장차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늙음이나 죽음이란 것도 바로 이와 같을 것입니다. 이 작품을 쓴 시인은 한때 우리 지역에서 시를 쓰며 살다가 다른 곳으로 떠나갔고, 이후 많은 삶의 곡절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모든 것 다 버려 두고 작품 속의 매미와 잠자리처럼 혼자 쓸쓸히 이승을 떠나가셨지요.

이동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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