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대구 화교

세계 어디든 배가 닿는 곳이라면 화상(華商)이 있고, 차이나 타운이 없는 도시는 드물다지만 대구에는 차이나 타운이 없다. 대신 중구 종로 가구골목에 화교소학교를 중심으로 '화교 거리'가 조성돼 있다. 2005년 10월 현대 대구에 사는 화교는 1천 명이 채 안 되는데 대부분은 중국집을 경영하고 있다. 화교 중국집 가운데 대표적인 곳은 '연경 반점'과 만둣집 '영생덕'이다. '연경 반점'은 수성구로 옮기기 전, 봉덕시장에 있을 때 '전가복'이나 '해삼탕' 같은 요리를 먹으려는 미식가들로 연일 미어터졌다.

◇ 경부 철도가 개통되고 난 뒤 1905년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대구 화교는 대개 3가지 직업을 가졌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으로 표현되는 포목상과 건축업, 나머지는 주물업이었다. 대구의 중국 포목상은 193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는데, 당시 815명 가운데 217명이 화교였다. 그 시절, 중국인 포목상 가운데 대표격인 '덕순영(德順永)'은 한 해 30만 엔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 대구에 들어온 중국인 가운데 지역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이들은 건축 기술자들이다. '대목'으로 불리던 중국인 기술자 강의관(姜義寬)과 모문금(慕文錦)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초대 안세화 드망즈 주교의 요청으로 대구에 들어와 남산동 주교관을 시작으로 성유스티노 신학교'성모당 등을 잇따라 지었다. 1918년 경에는 성당 뒤쪽 종루를 2배 높여 확장, 오늘날과 같이 아름다운 성당을 완성시켰다.

◇ 대구의 중국인 기술자들은 '쌍흥호'라는 건축회사를 설립해 힘껏 일했으며, 일단 약속한 것은 구두(口頭)라도 어기지 않아 신용과 실력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당시 지어진 벽돌 건물들은 얼마나 단단히 지었는지는 십수 년 전 계산성당 보수 공사 때 재확인됐다. 성당 외벽에 검게 덧씌워진 칠을 벗겨내고, 지붕에 청동을 올리는 보수 공사를 하면서 100년 된 벽돌을 얇게 깎아내도 상한 벽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 대구 화교가 올해로 100년을 맞아 8일부터 11일까지 종로 화교거리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 용춤'사자춤을 선보이고, 자장면도 싼값에 판매한다. 개발의 연대에 이 땅에서 차별을 받기도 했던 화교들은 아직까지 복지 혜택 없이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100주년을 계기로 우리 모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까.

최미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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