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상 밖)청도 운문면 수암 3형제마을

아침저녁으로는 꽤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다른 사람의 부대낌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청정 나물이 나고, 맑디맑은 물이 있고, '사람때'가 묻지 않은 곳에서 70년 세월 동안 3형제가 의좋게 오순도순 살아간다면 그곳은 정녕 '낙원'이 아닐는지.

갑갑한 세상을 멀리한 채 자연을 벗삼아 살고 있는 3형제를 찾아 나섰다. 청도 운문면 마일2리 수암(水巖) 마을. '열 마리의 용이 연못에 모여 살다 아홉 마리가 승천했다'는 구룡산(해발 675m) 중턱에 위치해 있다.

청도군청에서 경주방향으로 자동차로 1시간쯤 굽이굽이 도는 운문댐 주변도로를 돌면 끝자락에 지천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돌아 921호 지방도를 따라 영천방향으로 10여㎞ 가면 '구룡산 성불사'라고 적힌 안내간판이 보인다.

그곳에서 산길을 오르자 푸른 소나무 사이로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가 조금씩 자태를 드러내고 다람쥐가 뛰논다. 다시 10여 분을 가자 귓가에 황소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병풍처럼 펼쳐진 산자락을 배경으로 아늑한 양지에 들어선 마을이 다가왔다. 마을 길 돌담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호박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최용목(76) 할아버지는 "산골짝에 노인들만 있는데 뭐 볼 것 있다고 여기까지 왔어"하면서도 이방인의 방문이 꽤나 반가운 모양이다.

200여 년 전 경주 최씨 일족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최 할아버지의 6대조부터다. 한때는 많은 잡곡농사를 하고 땔감과 물이 풍부해 산아래 마을보다 더 부촌(富村)이었다고 한다. 50여 년 전만 해도 20가구 이상 거주했다. 6·25전쟁 직전에 공비들이 출몰하면서 국군들이 "공비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도움을 줬다"며 집과 농경지를 몽땅 불태워 주민들은 모두 이곳을 떠났다. 전쟁이 끝나자 최씨 3형제(둘째 동생 최태목(74) 씨와 부인 김용순 씨, 셋째 동생 최성목 씨와 부인 정필교 씨)는 유일하게 고향에 돌아왔다. 이때부터 50여 년 동안 마을을 지켜오고 있다.

맏형인 최 노인은 "젊은 시절 한때 도시로 나갈까 고민도 많이 했어. 요즘 같은 분위기였다면 벌써 이곳을 떠났을 거야. 하지만 후회는 없어.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남을 원망하지도 않고 형제끼리 서로 감싸주며 화목하게 지낼 수 있으니 더 바랄게 뭬 있어"하며 껄껄 웃었다.

부인 박필욱(76) 씨는 "부산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아들이 함께 살자고 조르는데 도회지 생활에 자신이 없어. 그저 내 손으로 농사지어 양식만 되면 만족한다"고 했다.

최씨 형제의 유일한 고민은 산짐승들이 농사를 망치는 것.

멧돼지의 성화를 막기 위해 논밭마다 도로 포장용 철망으로 울타리를 만들었지만 역부족이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잡곡 농사를 줄이고 밭벼 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모두 손작업으로만 농사를 짓다 보니 2천여 평의 일 년 농사가 소 한 마리 키우는 수익보다 적다.

또 집집마다 염소를 30~40마리씩 키우고 있다. 염소는 방목한다. 이 때문에 마을에서 염소 흔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봄에 나간 염소는 온 산을 누비다 날씨가 추워지면 새로 낳은 새끼를 데리고 어김없이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에서 분위기 메이커는 둘째 최태목 씨다. 남달리 이해심이 많은 그의 얼굴은 항상 웃음 가득하다. "TV를 보니 요즘 도시 사람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취직한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여기서는 정년퇴직이 없다 보니 아무 걱정거리가 없다"며 농담을 걸어왔다.

"평생 고스톱이나 장기, 바둑도 모르고 땅만 파고 살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고인 되던 1979년 마을에 전기가 들어와 TV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지. 그때는 도시사람 하나도 부럽지 않았어"

마을 반장을 맡고 있는 막내 최성목(67) 씨는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신세를 졌다. 형제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형제들의 성원으로 성목 씨는 건강을 회복하고 1주일 만에 집에 돌아왔다.

최씨 형제들은 몸이 아파 병원을 찾을 때가 가장 어렵다. 교통이 불편해 병원비보다 교통비 부담이 더 크다. 행정구역은 청도지만 생활권은 영천이다. 영천까지는 한 시간 거리지만 청도는 배가 넘는 거리다. 자식들 일로 일 년에 한두 차례 호적등본 발급받는 일을 제외하면 청도에 갈 일은 거의 없다. 반찬거리 마련을 위해 평소 시장에 갈 때는 경운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고개 넘어 영천 북안면 상리로 간다. 영천 가는 시외버스를 탈 수 있기 때문.

성목 씨는 "6·25전쟁 때 부상자 한 명 없었고 모두 근심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으니 이곳은 명당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부인 정필교(65) 씨는 남편 간병에다 소 4마리에 먹일 풀을 베어 나르는데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줄을 모를 만큼 바쁘다. 그녀는 맑은 날에도 항상 장화를 신고 다닌다. 풀밭에 다니면서 뱀에 물리지 않기 위해서다. 산골로 시집온 후 40년 세월, 미련도 후회도 없다.

정씨의 소망은 오직 한 가지. 재래식 화장실을 현대식으로 바꾸는 것. 손자들이 "시골 화장실이 불편해 할머니 집에 가기 싫다"고 해서다. 정씨는 "5년 전쯤 어느 날 난생 처음 군수가 마을을 방문했는데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가던 나를 보고 '너무너무 불쌍하다'며 다음날 장비를 보내 간이상수도를 넣어 줬다"며 "30년 된 낡은 슬레이트 지붕과 화장실 개량을 위해 군이 나서서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결혼 이듬해 이곳을 떠났다가 5년 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최태봉(66)·주은애(60) 씨는 3형제와는 재종(6촌)간이다. 그는 대구에서 택시와 주택사업으로 적잖은 돈을 모았다.

전원에서 노후를 보내기 위해 돌아온 그는 새마을지도자 일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1t 화물차를 몰고 다니는 그는 잔심부름부터 환자 이송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부인 주은애 씨는 "대구에 살다 이곳으로 내려온 후 한동안 적응하기 어려워 힘들었는데 요즘은 너무 좋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청도·정창구기자 jungcg@msnet.co.kr

청도, 영천 경계에 있는 구룡산 중턱 수암마을에는 최용목 할아버지 부부와 동생 부부들이 자연을 벗삼아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다.(왼쪽부터 최성목·정필교 씨 부부, 최태목·김용순 씨 부부, 최용목·박필욱 씨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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