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잔에 술, 두잔에 정

동네 술집이 가까워지고 있다. 더 이상 으슥한 골목에 자리 잡은 술꾼 아저씨들의 아지트가 아니다. 이젠 동네 주민들의 생활의 일부로 다가왔다.

이웃들끼리, 혹은 가족들끼리 간단한 안줏거리와 맥주, 음료를 시켜놓고 느긋하게 즐기는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더구나 요즈음은

저녁식사를 끝낸 이웃 주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골뱅이무침에 국수사리를 비비면서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도 어느덧 흔해졌다.

동네 술집이 자녀들의 교육정보 장소로, 아내들의 불만을 달래는 장소로, 또 부부들의 애정전선을 확인하는 장소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자녀들과 함께 프라이드 치킨을 시켜놓고 아이들은 탄산음료를, 부부는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더 이상 영화 속의 장면만이 아니다.해 진 후 정겨운 동네 술집의 시간대별 풍경을 담아낸다.

◎오후 7시∼밤 9시

1천 가구 이상 되는 대단지 아파트로 둘러싸인 대구시 북구 칠곡3지구 동천동. 호프, 꼬치구이, 횟집 등이 아파트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오후 7시. 아들, 딸 손을 꼭 붙잡은 가족들이 하나 둘 호프집의 테이블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10여 개의 테이블 중 가족끼리 앉아있는 테이블만 해도 5, 6곳. 이들은 치킨안주를 시켜놓고 오순도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꽃을 피워댄다. 얼핏 봐서는 술집인지 아니면 주택가에 자리 잡은 식당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아이들은 집에서 가져온 만화책, 동화책을 읽는가 하면 인근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와 나눠먹는 등 편안한 분위기다. 부부는 아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집안문제며 주말계획 등에 대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 호프집 주인도 익숙한 풍경인듯 자연스럽다.

이주훈(47·대구시 북구 동천동) 씨 가족은 "아내, 아들과 함께 탁 트인 곳에서 술 한잔하면 기분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적당히 마시게 돼 잠잘 때도 편안하고 좋다"고 했다.

◎밤 9∼11시

이제 가족끼리의 잔치는 끝난 듯하다. 손님들의 물갈이가 시작됐다. 계모임이라도 하는 듯 주부들이 4, 5명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주부들의 모습이 부쩍 늘어나는 시간이다. 아마도 이들은 저마다 식구들의 저녁식사를 해준 뒤 설거지까지 끝내고 홀가분하게 나선 것 같다.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듯 "위하여", "파이팅" 등 남자들의 전유물로만 알았던 건배구호도 외쳐본다.

물을 연신 들이켜는 주부는 아예 술을 마시지 못하는 듯하다. 그래도 분위기에 취해 이내 고민을 털어놓는다. 조금 취한 듯싶어 남편을 불러내는 간 큰(?) 젊은 새댁도 보인다.

이 동네에 산다는 김정순(58·여) 씨는 "막내가 대학 졸업반이라 이제 밤이라도 자녀들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며 "남편도 술 한잔하고 들어오는 정도는 이해하는 편"이라고 했다.

호프집 종업원은 "가족끼리, 이웃끼리 오기 때문에 늦은 시간이지만 술주정하는 손님도 별로 없다"며 "동네 주부들이 모이는 날이면 곳곳에서 웃음이 끊이질 않아 활기가 있다"고 2, 3년새 바뀐 분위기를 전했다.

◎밤 11시∼새벽 1시

아파트가 몰려 있는 대구시 달서구 상인지구. 이곳 아파트 주위의 구이집에는 이 시간이면 시끄럽다. 가족단위의 정겨움이나 주부들끼리의 수다는 사라졌다. 이제부터는 술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동네 주당 아저씨들의 시간이다. 세상살이에 지쳤을까. 40, 50대가 주축인 이들은 소주 한 잔을 쭉 들이켜며 "아이고 죽겠다", "사는 게 힘들다"는 등의 푸념을 늘어놓는다. 정치에 대한 쓴소리를 하는 것도 이들의 고정메뉴다.

이 시간 동네 구이집을 찾아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웃사촌. 때문에 "한 동네에 살면서 모르고 지냈다"거나 "이 기회에 술이나 한 잔 하자"며 잔이 테이블을 건너뛰는 것도 흔하다. 이쯤이면 동네술집은 이웃들과 친해지는 열린 공간이다.

달리기 등 밤운동을 마치고 가볍게 맥주를 마시기 위해 온 반바지 차림의 아저씨들도 가세한다. 이봉호(49·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씨는 "자기 전에 10㎞ 정도를 뛰고 나서 맥주 두세 잔을 마신다"며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혼자 와서 마셔도 부담이 없다"고 웃었다. 동네 술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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