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필리핀 대법원의 판결

"대구 동을 재선거 등에서는 지난 대선 때 사용된 전자개표기를 사용하지 말라."

열흘 전 대구의 모 변호사가 소송 대리인이 돼 제기한 '전자개표기 사용결정 집행정지 신청' 소송의 신청 취지다.신청인들의 주장은 선관위가 사용해 온 전자개표기는 투표 결과의 조작이 가능하고 부정확하며 유'무효표 등 인식 오류율이 당락을 뒤바꿀 수 있을 정도로 크므로 사용 집행이 정지돼야 한다는 내용이다.

소송 당사자들은 그러한 신청 취지의 근거로서 필리핀 대법원의 한 판결을 제시하고 있다.필리핀 대법원은 '한국산 전자개표기는 자동 개표 수행 능력에 심각한 의문을 가지게 하고 이전에 다운로드된 데이터를 탐지해 내지 못하는 등 선거 개표의 안전성 확보를 위한 요건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사용금지 가처분 판결을 내렸다.

뒤집어 보면 경제적으로야 한국이 필리핀보다 더 잘 나가는 나라일지 모르지만 정치적 수준에서는 부실 우려가 있는 전자개표기로 개표하는 한국보다 자기네 쪽이 더 공정하고 과학적이며 신중하다는 내심을 비치고 있는 듯한 판결이다.

한국의 자존심이 상하는 판결 같기도 하다. 이번에 필리핀 대법원이 부정확하고 조작 가능성을 의심한 한국산 전자개표기는 우리 대선 때 사용했던 개표기보다 위조 방어 기능을 추가, 개량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는 결함을 지닌 기계로 불신받았다.

300여 가지 입증 자료 등이 첨부된 이번 전자개표기 소송에 대해 서울 행정법원이 필리핀 대법원과 같은 판결을할지 기각할지는 알 수 없다.

비록 남의 나라 대법원의 의견이지만 부정 개표의 가능성이 한 치라도 있어 보이면 기계의 기술적 보완이 완벽해질 때까지는 사용을 금지시키는 것이 신성한 국민의 권리 행사를 완벽히 보호한다는 법정신에 맞는 일일 것이다.

더구나 이번 재선거는 선거구와 유권자 숫자가 적은 만큼 기계가 아닌 수(手) 개표로 한다 해도 시간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기계 검표보다 크게 불편할 게 없다. 또한 개표기에 대한 소송이 제기돼 있고 외국의 객관적 판결이 나와 있는 이상 티끌만큼이라도 '불신'을 남겨가며 기계 개표를 고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미 선관위는 스스로 2008년 국회의원 선거때부터 도입하려던 인터넷 전자투표도 보류키로 한 상태다.

인터넷 민원서류 위'변조로 인한 인터넷 민원 발급 중지 사태가 빚어지면서 전자투표도 해킹 등 위험이 있으면 기술 개선이 되고 검증 거치기 전에는 도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다면 전자투표나 전자개표나 기계에 의한 선거 관리는 기술적으로 완전할수록 좋다는 가치와 논리는 같아야 옳다.

전자투표는 부정확 위험이 있으면 안 하고 전자 개표는 부실 위험이 있고 제3국이 사용조차 안 하려 하는데도 굳이 하려 드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지난번 전자개표의 부정 의혹에 대해서는 이미 재검표로 판정이 난 사안이긴 하다. 끝난 일에 왜 또 소송을 걸었느냐고 변호인 측에 물어도 봤다. 그쪽의 대답은 재검표들이 과자 상자, 시멘트 포대 등에 담겨 있었고 포장'검인 상태도 불량했다고 했다. 재검표 이전의 관리에 대한 의혹을 내비쳤다. 소장에는 그런 사안에 대한 증거들이 제출돼 있다고 했다.

세상일에 옳고 그른 시비는 필요하다. 그러나 갈등은 적을수록 좋다. 송사(訟事)로 지새는 나라는 건강한 국가가 못된다.

걸핏하면 언론사와 비판 기사 놓고 소송 붙는 청와대, 술자리 욕설 시비로 술집 여성 고소하는 국회의원, 개표 기계 놓고 시비 붙는 유권자. 그런 한국인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산 개표 기계를 우습게 안 필리핀 대법관은 또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돈 바치고 질질 끌려다니는 금강산 관광도 그렇고 나라 자존심 상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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