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바람은 사과나무를 흔드느라 말이 없고

사과나무는 사과를 꼭 쥐고 말이 없다

바람 잔 뒤

가지에 사과 하나 겨우 매단 사과나무

어리둥절 서 있다

우듬지 걸려 있던 진회색의 슬픔

없다!

그 자리가

가만히 비어 있다

이경림(1947~) '태풍, 뒤'

올해도 몇 차례의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고 갔습니다. 태풍 소식이 들리면 농민들의 가슴엔 수심이 가득합니다. 이 작품에서 바람은 꼭 과수원의 연약한 열매를 떨어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습니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 사과나무는 오직 사과 한 알을 꼭 쥐고 있네요. 그 광경이 너무도 처연합니다. 살아가는 일은 이렇게 풍선처럼 팽팽히 부풀어오른 긴장의 연속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생존경쟁의 격렬한 틈바구니에서 결국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빈 손뿐일 것입니다. 마치 뼈만 앙상히 남아있는 고기를 매달고 항구로 쓸쓸히 돌아온 소설 '바다와 노인'의 주인공 할아버지처럼…….

이동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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