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상 밖' 사람들-포항 대송면 산여계곡 후동산방

대송면을 지나 영일만온천 200여m 앞 작은 다리에서 왼쪽으로 꺾으니 포항철강공단 4단지 조성공사 현장이 보였다. 이어 가파른 오르막 산길을 오르자 자장암 뒤편 길이 나타났다. 운제산(雲梯山) 등산로 입구다.

산여(山余)마을은 여기에서부터다. '상수원보호구역', '취사행위 일체금지' 표지판과 식당 몇 집을 지나 좁은 길을 따라 1km쯤 가자 비포장 길. 4륜 지프를 빌려타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과 맑은 계곡, 이름 모를 들꽃이 한데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내는 계곡을 따라 3km쯤 더 들어가서야 집 한 채가 보였다. 산여계곡의 끝집, 목적지인 '후동산방'(後童山房)이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있었다.

산방의 주인 김장식(67)씨는 김씨는 70, 80년은 됨직한 감나무 4그루가 마당을 지키고 서있는 집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큰 키에 다소 마른 몸매였지만 눈매만은 날카로웠다. 일흔이 가까운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늙을수록 아이처럼 천진하게 살자'라는 집 이름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뒤 중년의 여성과 할머니 한 분이 부엌에서 나왔다. "사모님. 폐를 끼치게 돼 미안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자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나뜨마님'이라고 불러주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본성은 김씨인 '아나뜨마'(47)씨는 어머니와 함께 김씨의 집에서 함께 산다. '아나뜨마'라는 단어는 산스크리스트말로 '무아(無我)'라는 뜻. 식사 등 생활은 한 식구처럼 하지만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부인', '사모님'등의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채소밭을 일구며 첩첩산중에 모여 사는 이들은 특이한 이력과 인연을 가슴 속에 묻어두고 있다. 부산이 고향인 김씨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그만둔 뒤 잡지사 기자 등으로 일했다. 아나뜨마씨와 만난 건 부인과 사별한 뒤 강원도 횡성 치악산 '가래골'에서 도(道) 공부한다고 산 속에 머무르고 있을 때.

"재수를 하고 있던 아나뜨마가 대학생 친구와 함께 봉사활동을 왔어요. 당시 아나뜨마는 수녀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며칠 동안 많은 이야기를 하다보니 뜻이 맞았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지만 자세하게 묻기가 어려웠다.

이들이 산여마을에 들어온 것은 85년. 올해로 꼭 20년째다. 첫 10년 동안은 전기없이 살았고 10년 전부터는 전기가 들어와 훨씬 편하게 산다고 했다.

김씨 등의 생활은 쌀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자급자족이다. "아나뜨마가 마을 이장으로 받는 수당과 기초생활수급자인 아나뜨마 어머니께서 받는 지원비, 제 아들(44)이 보내주는 용돈을 합치면 생활하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쌀만 사먹으면 되니까요."

김씨 말대로 이 집에서는 배추, 무, 상추, 콩 등 각종 채소를 집 옆 산등성이에 심어 놓았다. 옷은 얻어다 입는다.

김씨의 산여마을에 대한 자랑이 계속됐다. "아나뜨마가 일년에 한두번씩 언니가 있는 서울이나 도회지에 갔다오지요. 하지만 사흘도 못가 돌아옵니다. 시끄럽고, 공기가 나빠 머리가 아프다고 합니다. 산나물과 약초를 캐러 산 속을 누비는 재미야말로 참 행복아닙니까."

시를 쓰고 참선공부를 하며 지내는 김씨의 소원은 몇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좋은 책',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진리의 글을 남기는 것이다. 시집은 5권 냈고 내년에 한 권 더 낼 계획이다.

김씨는 도(道)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라고 했다. 참선공부도 '도'에 이르는 과정의 하나이며 '지혜' '자비' '평등심'을 갖기위해 공부한다고 했다.

"새벽 6시에 108배를 한 뒤 2시간 정도 채소밭에서 일을 하고 아침을 먹습니다. 일을 하지않으면 먹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일을 하지 않고 어떻게 참선이나 시 공부를 합니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저는 넉넉한 부자입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나뜨마가 점심을 차려왔다. 무공해 채소와 된장이 너무 맛있어 뚝딱 밥 두그릇을 비웠다. 마침 놀러와 있던 김씨의 친구 김형섭(수필가·경주 문화중·고교 재단이사장)은 "후동은 아직도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시인"이라며 "그의 시세계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공해, 배금주의, 물신(物神) 등을 질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저녁 늦게 자리에서 일어서자 김씨가 시집 한 권을 선물로 줬다. 시집 서문에 써준 고시(古詩) 한 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본시산중인(本是山中人) 애설산중화(愛設山中話) 오월매송풍(五月賣松風) 인간공무가(人間恐無價)'

('본시 산에 사는 사람이라/ 산중 이야기를 즐겨 나눈다/ 오월의 솔바람소리 팔고 싶으나/ 그대들 값 모를까 그게 두렵네') 포항·임성남기자 snlim@msnet.co.kr

사진 : 김씨가 집 옆 텃밭에 심은 배추를 손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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