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이 시대, 아니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역할은 무엇일까? 필자 역시 대학에 몸담고 있으니 외견상으로는 지식인의 부류에 속할 터-그렇다면 지식인으로서 이 지역을 위한 나의 사명 혹은 역할은 무엇일까?
1980년대 중반, 필자가 대학생이었을 때 이 사회는 민주화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시위와 데모로 캠퍼스는 최루탄 냄새로 찌들어 있었고, 그 매캐한 냄새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며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 쉼 없는 토론을 벌이곤 했다. 무척 힘든 시기였지만 젊은이들은 깨어 있고자 몸부림쳤고, 지식인들은 과감하게 불의에 맞섬으로써 이 사회의 민주적 변혁을 위한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어디 있으며, 초보 지식인인 나는 또 어디에 있는가? 스스로 돌이켜 되돌아보고, 각성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바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 지식인들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 이 지역 지식인들은 유교적 전통을 재해석·극복함으로써 유교의 발전적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옛것을 살피고 익혀 새것을 안다'는 의미인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곳이 이 지역이다. 전통과 풍습의 보존과 유지도 중요하다. 하지만 시대에 맞지 않고, 후속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전통이란 양복 위에 저고리 걸치고 갓을 씌워놓은 것처럼 어색한 모습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유교적 전통이 가지는 부정적·불합리한 측면을 극복하고, 그 고유한 정신을 현대적 의미로 되살리는 것은 이 지역 지식인들의 첫 번째 사명이다.
둘째, 지식인들은 지역적 보수성을 극복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 지역에서는 '진보적인 성향을 갖는 지식인=투쟁적 혹은 급진적'이란 인식이 팽배하다. 이와 같은 인식과 판단은 지식인들이 가져야 할 이성적 기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감정적이요 학습된 것이다. 그러니 주류적 흐름인 보수에서 벗어나 다른 색깔을 가진 지식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대단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득권'에 속하나 지식인 사회에서는 '소수자'로 살아야 한다. 보수라는 한 가지 색깔만을 가진 이 사회가 어찌 건전하다 할 수 있겠는가? 이 지역이 다양한 색깔과 목소리를 수용하는 민주적인 구성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식인이 가진 보수성을 극복해야 한다.
셋째, 이 지역이 가진 배타성과 이기주의의 극복-지식인들의 또 다른 사명이다. 우리와 지역적 갈등을 겪고 있는 전라도 사람들이 가장 적응하기 힘든 곳이 바로 경상도 지역이 아닐까? 하지만 문제는 비단 전라도 사람들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주민들도 경상도 지역, 특히 대구·경북 지역에는 살고자 하지 않는다. 끈끈한 정과 의리에 바탕을 둔 강한 결속과 유대감-이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 오히려 이 지역을 얽어매는 강한 배타성과 이기주의로 나아가고 만다. 이 같은 모습은 주민들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 사회도 마찬가지 성향을 보이고 있다. 우리의 내면과 외연에 드러나 있는 편협한 배타성과 이기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지역 지식인들이 고민해야 할 세 번째 문제이다.
넷째, 국제 사회의 흐름을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 90년대부터 인터넷을 필두로 급속하게 진행된 국제화 혹은 세계화는 이제 대세적 현상이 되고 말았다. 중앙·지방정부 혹은 개인과 지역을 막론하고 국제화의 '시간과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서는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 지역 고급 인재와 자본의 수도권 유출이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 버린 것은 오래전 일이다. 더욱이 이 지역의 보수성과 배타성은 젊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와 진취적 실천력을 가로막고 있는 최대의 장애물이다. 폐쇄적이고 정체된 지역의 사고방식과 경제를 일신시키기 위해서는 국제화 시대에 걸맞은 발전 모델이 모색·제시되어야 한다. 이 지역 지식인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하고 절실한 것이다.
최근 우리 지역에서는 지식인들의 '비판정신'이 사라지고,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한 듯하다. '머리는 차갑게, 그러나 가슴은 따뜻하게!' 필자를 포함한 이 지역 지식인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 마음가짐이어야 하리라.
채형복 영남대 법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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