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리 내세울 것이 없는 노인네다. 평생을 일에만 빠져 앞만 보고 살았던 사람이다. 나보다 열성적이고 훌륭한 분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지면을 통해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한편 겸연쩍고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내 삶의 대부분은 이 고장과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역동적인 순간들과 고락을 함께 하였다. 이제부터 시작하는 우민한 글이 비록 보잘 것 없는 경험에 불과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은 물론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백수(白壽)를 아직 누리지는 못했으나 90세 가까이 살아왔으니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낸 셈이다. 급변하던 격동기에 태어나 자란 탓에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래서 더 살기 좋은 세상을 소원하며 열심히 노력했는지 모르겠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 전쟁, 전국토는 황폐화되고 그나마 식민시대의 산업시설마저 파괴되어 너나 할 것 없이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이었다. 변변한 장비하나 없이 말 그대로 맨주먹으로 전후복구사업이 활발했던 그때, 지금의 대구 동인네거리 부근에서 소규모로 창업을 한 것이 오늘날 화성산업(和成産業)의 시작이다.
당시의 많은 기업들이 명멸하고 강산이 다섯번 바뀌는 동안, 화성산업은 대표적인 향토기업으로 성장해 왔다. 이 땅에 태어나서 무언가 뜻 있는 일을 이루어 내었는가 하는 뿌듯함에 앞서 지역민들의 성원과 사랑 그리고 화성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화성산업을 이야기하자면 삼화토목을 빠뜨릴 수 없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 10월 1일 설립되어 이듬해에 나를 포함한 7명을 발기인으로 하여 주식회사로 바뀌었다. 그 시절 몇 안되는 주식회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956년 3명의 공동대표이사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난 사장의 직책을 맡아 회사의 살림살이까지 챙기게 되었다. 그 후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기업경영을 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이 1958년 9월 1일 세상에 태어난 화성산업이다.
창업 후 산업근대화 시절을 거쳐 최근에 이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과 역경의 파도를 넘어왔다. 어려운 시련이 닥칠 때마다 화성가족들은 헌신적으로 극복해 나갔으며, 어려웠던 시절을 교훈삼아 많은 보람과 자랑을 일구었다. 내가 평생을 살아오며 소중히 여기는 가치다. 우연한 계기로 건설에 몸을 던졌고 그것이 필생의 업(業)이 되었는데, 그로써 내 고장 내 나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기를 소망한다.
세상 일은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노력한다고 다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화성산업의 성장은 내 노력과 능력에 비해 과분한 보상이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 받은 게 많은 사람인지라 이제 천수(天壽)를 다할 때까지 내 소임은 이 땅에 뿌리며 사는 것이리라. 이제부터 기억의 편린을 쫓아 가물거리는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본다.
화성산업(주) 이윤석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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