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이념 논쟁

강정구 교수에 대한 천정배 법무부장관의 불구속 지휘와 이에 따른 김종빈 검찰총장의 사표제출로 우리 사회가 다시 이념논쟁에 휘말리고 있다. 이념논쟁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과거사 논쟁과 이념논쟁이 그러했듯이 이번 논쟁도 소모적인 편 가르기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한쪽에서는 상대를 친북좌익세력으로 딱지 붙이기를 하고, 다른 쪽에서는 자신에게 비호의적인 언론사를 독극물이라 부를 때 생산적인 이념논쟁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이념은 무엇보다도 바람직한 미래에 대한 비전이다. 이념은 또한 실천을 지향해야 한다. 혁명의 시대에서 이념은 미래에 대한 비전의 실현 가능성을 그리 문제 삼지 않을 수 있었다. 현실의 모순이 너무 심한 경우, 실현 불가능한 장밋빛 환상도 사람들을 행동으로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은 혁명의 시대가 아니라 '개량'(reform)의 시대에 존재한다. 개량의 시대에서 이념은 미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청사진을 제공해야 한다. 미래의 이상이 분배정의, 평등, 자유, 행복 등 주로 추상적 가치로 구성된다면, 청사진은 이러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정책이다. 이념 논쟁은 추상적 가치를 둘러싼 공허한 말싸움이 아니라 구체적 정책을 두고 이루어져야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통합에 기여할 수 있다. 개량의 시대에서는 원칙도 없다고 오해받을 수 있는 탈이념적 실용주의 노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 정책과 실천을 통해 이상을 실현해나가는 실사구시적 이념 노선이 필요하다.

혁명의 시대에서 국민은 최후의 그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만, 개량의 시대에서는 국민은 정해진 청사진에 따라 미래의 이상이 점차로 실현되고 그 성과를 구체적으로 향유하기를 원한다. 중산층과 서민이 잘사는 나라는 허황된 구호가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국정 4대 원리 중 하나가 대화와 타협이다. 지난 12일 이해찬 총리가 대독한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대통합 연석회의'를 제안하면서 갈등과 분열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국민통합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정배 법무부장관의 검찰 지휘권 행사는 갈등과 분열이 뻔히 예상되는 데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는 데 문제가 있다. 형사소송법의 원칙에 충실하여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의도는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공안사범에 대한 불구속수사 원칙을 평소에 그렇게 강조하지 않고 있다가 강정구 교수 사건이라는 휘발성 사건에 갑자기 구체적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다. 정치적 전략으로서도 실패작일 수밖에 없다. 일시적으로는 지지세력 규합의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참여정부의 국민대통합이 말뿐이지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의심을 국민 다수의 마음속에 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도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명분으로 한 대여 장외 구국투쟁 식의 극단적 전략은 자제해야 한다. 장외투쟁은 한나라당이 지키려는 자유민주주의를 더욱 위기로 몰아갈 뿐이다.

개량의 시대를 사는 국민은 정치권의 비생산적인 혁명 시대의 이념 논쟁에 염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개량의 시대에 걸맞은 이념노선을 명확히 하라고 우리 정당들에게 지금 당장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겠으나,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키는 소모적 이념 논쟁보다는 민생부터 챙기라는 주문은 가능할 것이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덮어씌우기 식 이념 논쟁의 격화는 정상적인 국정운영을 불가능하게 한다. 정상적 국정운영이 불가능할 때 국정운영의 잘잘못에 대한 책임의 소재를 따지기가 어려워지고, 다음 정권의 창출은 비합리적 요소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민주적 책임성이라는 합리적 기준에 의해 정권 창출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정당이 먼저 현재의 소모적 이념 논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이다.

정준표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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